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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성불자 모임 '선행회'/ 밥퍼 아지매, 12년째 "국밥 묵고 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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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여성불자 모임 '선행회'/ 밥퍼 아지매, 12년째 "국밥 묵고 가소~"

입력
2009.05.06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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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오전 9시 대구 시민의 휴식처인 달성공원 원숭이우리 인근 공터. 불자 아지매들 모임인 '선행회'의 청일점 김탁근(61)씨가 석유 버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10여년 이 일을 해온 전문가의 솜씨지만, 버너 3개에 모두 불을 붙이는데 40여분이 걸렸다.

"퍼뜩(빨리) 국 끼리고(끓이고) 그릇 씨꺼라(씻어라)." 총주방장 한정임(71)씨의 말이 떨어지자, 본격적인 무료급식 준비가 시작됐다.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던 30여명의 아낙들이 나물 씻고, 무 썰고, 파 다듬고, 쇠고리를 버무리느라 바빠졌다. 고무장갑을 낀 설거지 부대는 인근 창고에 넣어둔 그릇 500개와 수저를 꺼내와 말갛게 헹궈냈다.

점심 배식이 시작되려면 2시간 넘게 남았는데도 벌써 50여명의 노인들이 모여들었다. "쪼매만 기다리이소." 처음 온 이들에게도 이웃 사촌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모임 고문인 윤청자(82), 한복순(85)씨가 나타나자 "초창기 멤버 오셨네"라며 다들 반겼다. 서문시장에서 장사하는 후원자 장윤재(60)씨도 "보태 쓰라"며 1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고 갔다.

드디어 낮 12시. 즉석 배식대를 차려지고, 국자를 든 배식 아지매들이 줄지어 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쇠고기국밥 한 그릇을 받아 든 어르신들은 봄소풍 나온 아이처럼 얼굴이 밝아졌다.

김숙자(88) 할머니는 "아이고, 나이 들면 빨리 죽어야 되는데"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20여년간 노인대학 등에서 무료 점심을 먹다 이날 처음 달성공원을 찾았다는 장창희(80) 할아버지는 "국수인 줄 알았는데 쇠고기를 먹다니 복 터졌다"며 입맛을 다셨다. 이날 찾은 손님은 700여명. 다 먹은 그릇을 씻어 다시 내놔야 할 정도였다.

원래 이날 예정 메뉴는 국수였다. 4월엔 목요일이 다섯번 있어 주머니 형편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전인 29일 새벽 기도를 하던 김순옥(69) 선행회장은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쪼들리지만 부처님 오신 날 앞두고 국수라니…." 결국 그는 식자재 구입을 맡은 정성옥(56)씨에게 전화를 했다. "쇠고기국밥으로 하입시더."

선행회의 목요 무료급식 봉사는 올해로 12년째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4월 봉사를 시작한 이래 태풍 루사가 오거나 동장군이 맹휘를 떨칠 때도 거른 적이 없다.

30여명의 '밥퍼' 아지매들은 동화사, 북지장사, 감천사, 대원사, 법왕사 등 각기 다른 절에 다니는 50~80대 불자들이다. 50대면 젊은 축에 들지만, "아지매" 소리 들으면서 밥을 퍼주기 시작했으니 나이에 상관없이 '밥퍼 아지매'로 통한다.

선행회 무료급식에는 보통 300∼400명이 찾았는데, 올들어 인근 교회에서 급식을 중단하면서 700여명이 몰리고 있다. 김 회장은 "몸은 고달프지만 음식은 함께 나누는 맛 아니냐"며 "넉넉하진 않지만 우리 손으로 필요한 이웃을 도울 수 있어 흐뭇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중장년층이 무료급식 대열에 대거 합류한 것은 가슴 아프다. 김만희(53) 총무는 "얼마 전까지도 60대 이상이 주류를 이뤘는데 요즘은 사는 게 각박해져서인지 50대는 기본이고 젊은이도 가끔 눈에 띈다"고 귀뜸했다.

총주방장 한씨는 노인들의 입맛을 걱정했다. "미각이 떨어져서 그런 지 노인들이 자꾸만 짜게 먹는다. 건강을 생각해서 국은 약간 심심하게 끓인다"고 했다.

선행회 회원들이 급식봉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1981년 "좋은 일 하고 살자"며 선행회를 만든 김 회장 등 초창기 멤버들은 29년째 대구교도소와 청송교도소, 아동보호시설 등을 찾아 음식과 옷가지를 나누며 말벗이 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1일에는 대구구치소에 수감된 1,400여명의 미ㆍ기결수들이 배불리 먹도록 떡을 돌렸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에까지 이어졌다. 1996년 10월 사이판의 '태평양 한국인 추념 평화탑'을 찾아 2차 세계대전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냈다. 윤청자, 한복순 고문 등은 떡과 과일에 나물까지 직접 비행기에 실어 날랐다.

선행회의 공덕이 쌓이면서 달성공원은 자원봉사의 천국이 되고 있다. 함께하는 마음재단은 매주 토요일 점심 봉사를 하고 있고, 금복주 '참사랑봉사단'과 대구농협 '두레봉사단' 등 봉사단체들의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 미용학원을 운영하는 성윤택(44)씨는 가끔 어르신들의 머리단장을 돕는 것으로 마음을 보태고 있다.

선행회 김 회장은 "국밥과 국수, 떡만두국 등을 나누는 이곳은 야외 법당과 다름없다"며 "달성공원이 있는 한 목요일에 이곳을 찾으면 선행회가 대접하는 점심 한 그릇을 드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 급식이 끝난 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한 밥퍼 아지매들은 다음주 목요일을 기약하며 고개 숙여 합장했다.

글·사진 대구=전준호 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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