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복이 읍서 이렇치유." 이종분(81)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고 어지럽다며 말하는 내내 고개를 숙였다. 복이 없다는 말은 자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할머니는 슬하에 6남매를 뒀다.
비록 남편을 일찍 떠나보냈지만, 자식들이 장성했으니 외로움이 덜할 시기다. 그러나 이 할머니의 처지는 전혀 다르다. 호강은 둘째 치고 자식들 걱정에 맘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이 할머니의 신산한 삶은 신혼 초부터 시작됐다. "큰집에서 제곱날(분가할) 때 쌀 두 말도 못 들고 나왔슈. 큰집이 얼마나 구두쇠였던지…."
50여년 전 남편과 함께 큰집에서 분가해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흙벽돌 집에 둥지를 틀었다. 처음엔 남편과 함께 품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생겨나면서 생활은 점차 곤궁해졌다. 논 한 마지기도 없었던 이들 부부가 품팔이로 버티기엔 현실이 너무 힘겨웠다.
"애들 공부는 엄두도 못냈슈. 지들이 국민핵교만 졸업하고 몽뚱아리 하나 챙겨서 객지로 나갔슈." 이 할머니는 자식들 얘기를 꺼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공부를 제대로 못 시킨 것도 억울한데, 몸이 성한 자식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세상살이가 왜 이리 기구한 것일까. 올해 61살인 장남은 오래 전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신이 됐슈. 여주에서 살고 있는디, 몸이 성한 디가 없슈." 4살 터울인 둘째 아들은 몇 년 전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는데, 최근 재발해 몸을 제대로 못 움직인다.
몸이 불편하다 보니 일주일에 많아야 이틀가량 막노동을 해서 겨우 먹고 산다. 이 할머니는 인천에 사는 둘째 아들에게 유독 정을 많이 붙여서인지 틈틈이 쌀을 부쳐준다. 생활보호대상자인 자신이 한 달에 20㎏씩 받는 쌀을 절약해서 보내주는 것이다.
거제도에 사는 셋째 아들은 연락도 제대로 안 된다. 다행히 그 밑으로 줄줄이 낳은 딸 셋은 일년에 한번 정도 친정(할머니 집)에 오지만, 형편이 어렵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큰 딸하고, 막내는 이혼했슈. 막내도 교통사고를 당해 지대로 몸을 못 움직여유."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숨으로 날밤을 새기 일쑤다. 자식들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객지에 나가 고생하는 게 모두 자신 탓인 것 같아 가슴이 메여온다.
지금 사는 흙벽돌 집도 할머니 마음처럼 여기저기 생채기가 적지 않다. 지은 지 50년 정도 된 집이지만, 초가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꾼 것을 제외하곤 옛 모습 그대로다. 건물 본체와 따로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 나무를 때워 음식을 해야 하는 아궁이식 주방, 얼마 전 거센 바람에 날아간 부엌의 구멍 뚫린 슬레이트 지붕…. 어느 곳 하나 성한 데가 없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고 30년 넘게 혼자 살아온 이 할머니에겐 이런 집조차 소중한 보금자리로 여겨진다. "그냥 사니께 (불편한지) 잘 모르겄슈."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수백 만원을 들여 집을 고쳐준 현대제철 봉사단원들의 얘기에 이르자,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조금씩 번져갔다.
현대제철 집수리 봉사단은 '희망의 집수리' 1호집으로 선정된 이 할머니의 집을 4월 초부터 보름 간 수리해줬다. 말이 수리지, 거의 새 집을 짓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궁이식 주방을 입식으로 바꿨고, 싱크대를 새로 설치했다.
몸이 불편해 제대로 움직이기 어려운 할머니를 위해 외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 대신 주방 한 켠에 양변기를 놓은 화장실을 마련했다. 한겨울에도 밖에서 세수하는 할머니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세면대도 함께 설치했다.
바람에 날아갈 듯 불안하게 얹혀있는 슬레이트 지붕은 단단히 고정시킨 뒤, 방수 페인트를 발라 장마철에 비 새는 고통도 겪지 않도록 했다. 물론, 기울어진 외벽도 수리하고 단열재로 보강했다.
할머니는 봉사단원들이 집 고치는 모습을 양지 바른 마당에 앉아 내내 지켜봤다고 한다. 당진군 자원활동봉사회에서 일하는 마숙희 합덕읍 여성소방대장은 "할머니는 먼지가 날리는데도 집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며 "혼자 살다 보니 집을 어찌나 소중히 여기는 모르겠다"고 할머니의 '집 사랑'을 거들었다.
수리된 집은 사실상 새 집 수준이다. 골격만 그대로일 뿐, 집 전체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초록색 페인트를 입은 지붕은 하늘과 맞닿았고, 깔끔하게 고쳐진 주방은 예전 모습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부시다. 집 수리를 도운 한국해비타트 김선애 간사는 "할머니가 너무 좋아해서 마치 내 일 같이 기쁘다"고 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딨슈. 정말로 고맙쥬." 이 할머니는 집을 고치는 동안 마치 자식을 돌보듯 집을 지켰다. 집 수리는 당초 1주일을 예상했는데, 집이 워낙 낡아 여기저기 손 봐야 할 데가 많아진 탓에 보름이나 걸렸다. 깨끗이 수리된 집 마당에 선 이 할머니가 마치 새 자식을 얻은 냥 함박웃음꽃을 피운다. 오늘 따라 할머니의 어깨가 으쓱 올라간 듯 하다.
■ '따뜻한 철' 실천하는 현대제철 자원봉사
현대제철은 1953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강회사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대한중공업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출범했으며, 내년에는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생산하는 일관제철소로 거듭난다.
'딱딱하다'는 철강기업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해 봉사활동에 더욱 적극적이다. 2005년 4월 관리직 사원 1,200명으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을 발족한 게 첫 걸음이었다. 자원봉사단은 공장 및 영업소가 있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포항, 당진 등에서 자연보호활동, 소외계층 방문, 헌혈 등의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7년부터는 봉사활동 활성화를 위해 봉사실적을 팀 평가 기준으로 활용하는 평가시스템을 도입했다. 개인별로 연간 36시간(월평균 3.2시간) 이상의 봉사활동을 목표로, 팀별로 직접 봉사 프로그램을 구상하기도 한다. 장애인 및 노인시설 방문, 농촌마을 일손 돕기, 집짓기, 조손(祖孫)가정 청소년 멘토링 활동 등 영역이 다양하다.
현대제철은 올해부터 3년간 펼칠 '매칭 그랜트'(직원 참여 기금) 지정기부 사업으로 '희망의 집수리' 사업을 선정했다. 이를 위해 2월 한국해비타트와 협약식을 맺고 집수리에 참여할 대학생 봉사단 '해피예스(Happy Yes)'를 출범시켰다.
총 100명으로 구성된 해피예스 봉사단은 올해에만 소년소녀, 독거노인, 장애우 가정을 포함한 저소득층 50세대의 집수리 봉사에 참여한다. 이번 이종분 할머니의 집도 이들의 손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현대제철은 올해 당진을 시작으로 향후 인천과 포항 지역으로 집수리 사업을 확대할 예정이다.
현대제철은 임직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매월 급여에서 일정금액을 공제하고 같은 금액만큼 회사가 지원하는 매칭 그랜트를 통해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05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사회복지법인 '아이들과 미래'에 1억여원을 기탁했고, 2006년에는 이 기금으로 인천ㆍ당진공장 지역 9개 공부방에서 문화체험 및 캠프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또한 2007년에는 전국장애인시설 투척용 소화기 지원사업에 기금을 활용했으며, 올해부터 3년간 실시되는 집수리 사업도 이 돈으로 이뤄진다. 현대제철의 직원참여 기금은 직원 1인당 2,000원에서 2만원까지 자율적으로 액수를 정해 참여하고 있다.
우유철 현대제철 사장은 "앞으로도 소외된 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당진=박기수 기자 bless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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