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가부장 문화의 뿌리가 깊다. 특히 노년층은 아직까지도 절대적으로 남성 우위의 사회다. 일본 생활이 20년이 다 돼가는 한국인 지인은 언젠가 동네 식당에서 노부부의 식사 장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특별히 다툰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남편은 한 마디 대화 없이 자신의 식사를 끝내고 부인이 채 절반도 먹지 못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부인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서둘러 수저를 놓고 남편을 따라 나갔다고 한다.
한국 못잖게 가부장적인 일본
60대 이상의 일본 남성 중에는 시장에서 평생 한 번도 뭘 사본 적이 없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이혼 위자료로 부인이 남편 연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도록 연금제도가 바뀐 뒤 일본에서 '황혼 이혼' 상담이 급증했다는 것은 남녀 불평등 구조에 대한 불만의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본 사회에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3월에 교토(京都)시에서 '남성 간병자와 지원자 전국 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가 출범했다. 일본에서 가족의 간병을 책임지는 인구 중 남성은 30%에 이르지만 남성 간병자 모임은 처음이라고 한다. 치매 등으로 투병하는 부인이나 가족을 돌보는 남성끼리, 또는 그들을 지원하는 후원자들이 정보를 교류하며 의지하고 정부에 정책을 제언하자는 취지다.
이 단체가 모집한 남성 간병자 수기가 최근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소개됐다.
내후년에 환갑인 오사카(大阪)의 도야마(外山)씨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내를 간호한 지 올해 8년째다. 아내의 병이 진행되면서 자신도 "정신적ㆍ육체적으로 한계에 도달하는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는 방법을 발견했다.
"다행인 것은 제가 아내에게 화장을 해줄 수 있다는 겁니다. 아내를 화장해 주는 시간이 즐겁고 화장을 해 주면 아내가 웃습니다. 제 괴로움을 잊게 할 100만달러짜리 미소입니다. 최근 들어서는 간호하면서 즐거운 일만 생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웃으면 아내도 웃습니다."
도쿄(東京)에 사는 70대 후반의 이토(伊藤)씨는 올해로 11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을 간병 중이다. 처음에는 정성을 다해 간병했던 그도 시간이 지날수록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아내를 "난폭하게 다루거나 소리 지르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돌아오는 것은 늘 후회와 자기혐오였다.
"아내의 미소가 최고의 구원"
급기야 3년 전부터는 갑자기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쉬기 힘들어지는 증상이 나타나 "최대한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옷을 갈아 입혀 의자에 앉히고 아내에게 몸 상태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말이 들린 것 같아 귀를 아내의 입 가까이 갖다댔습니다. '고마워요'라는 소리인가 싶어 다시 귀를 기울였더니 확실히 '고마워요, 미안해요'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몸의 자유는 물론 사고도, 단어도 잃은 아내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짜내 필사적으로 자기를 지켜달라는 비명을 지르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환청인가…. 제가 말을 걸면 아내는 가끔 반응을 보이며 표정이 편안해집니다. 그 순간 저는 작은 행복에 젖어 구원 받습니다." 보수적인 일본 남성들이 아내를 간호하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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