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가 피해자를 살해한 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했다가 형사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 자수하면서 민사적 책임마저 모면하는 현실을 어떻게 시정할 수 있을까.
일본 최고재판소는 28일 자수 이후부터 배상 책임이 기산된다는 논리로 살인범의 민사 책임을 묻는 판결을 냈다.
29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최고재판소는 1978년 도쿄(東京)의 한 초등학교 여교사(당시 29세)를 살해한 뒤 자택 마루 아래에 묻고 형사 공소시효(15년)가 종료된 후인 2004년에 자수한 전 경비원(73)에 대해 유족에게 4,255만엔(6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측 변호인에 따르면 전체 배상액은 사건 이후 배상 지연금을 포함해 1억엔이 넘는다.
최고재판소는 ▦범인이 의도적으로 피해자의 주검을 감추었고 ▦이 때문에 상속인(유족)이 범행 자체를 모른 채 20년(손해배상 공소시효)이 흘렀다는 점 등을 들어 "상속인이 권리행사를 할 수 없는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가 배상 의무를 면하는 것은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이어 "상속인이 확정된 시점(피해자의 사망 및 신원이 확인된 시점)부터 6개월 동안 피상속인이 가진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민법 규정을 적용했다. 유족들은 피해자가 확인된 2004년 12월부터 약 4개월 후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판결에 앞서 도쿄지방재판소는 손해배상 소송 제기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살해 행위의 배상 책임은 인정치 않고 사체 은폐 책임만 물어 범인에게 330만엔의 배상을 명령했었다.
한편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8년에도 예방접종 부작용으로 장해자가 된 남성이 국가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권리행사가 불가능했던 원인이 가해자의 불법 행위에 있는 경우 소송 배제 기간을 적용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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