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소용돌이가 세계경제를 강타하던 지난 1월28일(현지시각).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2명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초청했다. 민간경제계 인사들로부터 경제위기 극복의 해법을 들으려는 자리였다.
"(지금은) 단순 경기 부양책을 쓰는 것보다는 국가 기반 시설과 경제를 변화시킬 만한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사뮤엘 팔미사노(59) IBM 회장은 예상대로 '혁신기술개발론'을 강조했다. 새로운 기술개발을 통해 구축된 기반시설이야말로 가장 경쟁력 있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 촉진의 지름길이란 얘기였다.
IBM은 그런 기업이었다. 끊임없는 연구개발(R&D)과 혁신을 통해 신기술을 창조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지속가능성장을 이어온 기업이었다. 길지않은 정보기술(IT)산업의 역사지만, 종합적인 경쟁력에서 IBM에 필적한 기업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IBM을 이렇게 부른다. '영원한 제국'이라고.
경영 혁신의 DNA
IBM이라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이 회사의 올 1분기 매출은 217억1,000만달러로 전년동기 대비 11% 감소했고, 순이익 역시 1% 줄어든 23억달러에 그쳤다.
하지만 거의 모든 IT기업들이 적자과 역성장의 늪에 허덕인 점을 감안하면, 확실히 IBM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팔미사노 회장도 "매우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분명 선전했다"고 자평 했을 정도다.
비결은 뭘까. 해답은 IBM식의 생존법, 바로 경영혁신에 있었다. 업계에선 "IBM의 경영엔 혁신의 DNA가 있다"고 평가한다.
IBM은 원래 PC회사다. IBM의 역사는 PC의 역사와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IBM은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떠오르는 고부가가치 영역에 진출하기 위해 PC와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등 범용상품사업을 매각했다. 자신들의 뿌리인 사업이라도, 수익성과 장래성이 불투명하다고 판단되면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바로 IBM식 경영혁신의 요체인 것이다.
대신 IBM은 지난해까지 100여개의 관련기업을 인수함으로써, IT비즈니스 분석과 컨설팅, 그린 솔루션 등 서비스쪽에 주력했다. IT제조업체(PC생산)에서 IT서비스업체(컨설팅)로, 180도 변신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체가 서비스업체로 전면 탈바꿈한다는 것은 웬만한 기업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조업 시절이든, 지금이든 IBM에겐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R&D다. 글로벌 경기의 부침에 관계없이 R&D투자 만큼은 지속ㆍ확대한다는 것이야말로 IBM 역사를 관통하는 경영 철학이다. 실제로 2002년 47억8,000만달러에 머물렀던 IBM의 R&D지출은 2004년 56억7,000만달러→2006년 61억700만달러→2008년 63억3,000만달러로 계속 증가했다.
그 결과 2002년 812억달러에 그쳤던 매출은 2008년엔 1,036억달러까지 상승했다. PC의 성공신화는 서비스ㆍ솔루션 사업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실패는 성공의 자양분
IBM에게도 시련의 계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의 차이는 시련의 유무 아닌, 시련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었다. IBM도 마찬가지였다.
1914년 토마스 왓슨이 설립한 IBM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업종을 막론하고 세계 시장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 가장 오래 갈 것 같은 기업으로 여겨졌다. 각종 언론이 꼽은 '가장 존경 받는 기업' 리스트엔 늘 IBM이 상단을 차지했다. PC 등 각종 디지털 사업에선 항상 기술표준을 선도했으며, 사원들은 최고의 급여와 복리후생을 누렸다. 오죽하면 미국 내 본사 직원들에게 "당신은 미국인인가 IBM맨인가"라고 물으면 기꺼이 "나는 IBM맨이다"라고 대답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기업은 생명체이고, 그렇기 때문에 영속이란 없는 법. 영원한 절대 강자일 것 같았던 IBM의 권세도 1980년대 중반 이후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룡'처럼 비대해진 조직과 타성에 빠진 경영문화는 급변하는 세계시장을 읽지 못한 채 탄력성을 잃었고, 결국 의사결정지연과 생산성 하락 등 부작용을 일으켰다.
하지만 위기를 이겨 낸 기업들이 대체로 그렇듯, IBM에도 '영웅적 리더십'이 있었다. 뒤늦게 위기를 깨달은 IBM경영진은 총체적 난국극복하기 위해 당시 제과 업체인 나비스코의 루이스 거스너 회장을 구원투수로 영입(1993년3월)했다.
최고의 IT기업 CEO가 최고의 IT전문가일 필요는 없었다. 비록 PC와는 무관한 제과업체 출신이었지만 거스너 회장은 대규모 인력 감축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난파직전의 IBM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거스너 회장 부임 5년만인 1997년 IBM은 마침내 모든 사업을 흑자로 전환됐고, 무여 80억달러에 달하는 순이익을 달성했다.
거스너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 받은(2002년3월) 사뮤엘 팔미사노 회장은 IBM의 사업구조조정을 이끈 인물이다. IT서비스업으로의 전환에 대해 논란도 많았고 반대도 많았지만, IBM은 결국 해냈다. IBM은 현재 선진국 뿐 아니라 브릭스(BRICs) 등을 신흥시장에서도 영향력을 넓혀가며 글로벌 최고의 IT서비스 통합기업으로서의 면모를 다져가고 있다.
■ '스마터 플래닛' 프로젝트/ "더똑똑한 지구를 만들자"
"더욱 작아지고 똑똑해진 지구에 적응하는 기업만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것이다."(2008년11월 뉴욕에서 열린 외교관계위원회에서)
사뮤엘 팔미사노 회장은 지난해 말 글로벌 경제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혁신 서비스로 '스마터 플래닛'(Smarter Planet)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스마터 플래닛'이란 첨단 IT기술과 지능화된 컴퓨팅 기술을 활용한 '똑똑한 시스템'으로, 사회 전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 고도로 발달된 IT기술을 대중교통이나 식품유통, 수자원 보존, 의료 시스템, 에너지 산업, 건강관리 시스템 등 모든 공공 및 민간 영역에 적용 함으로써, 한층 더 똑똑해진 프로세스와 시스템으로 혁신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스웨덴 스톡홀름이 지능형 교통통제시스템 도입으로 20%의 교통량을 줄이고, 오염물질 배출도 12% 가량 줄인 것은 IBM의 스마터 플래닛이 적용된 대표적 사례다.
IBM에 따르면 미국은 혼잡한 도로 때문에 연간 780억 달러의 비용과 42억 시간, 29억 갤런의 휘발유가 낭비된다. 의료 역시 낙후된 시스템에 따른 불필요한 의료비용 지출로 연간 1억명 이상이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IBM은 도로시스템이나 의료시스템을 '스마터 플래닛' 적용을 통해 첨단 지능화함으로써, 이런 시간과 비용 및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IBM은 또 의약분야에서 현재 각각 다른 시스템에 저장돼 있는 신약개발 및 의료보험 등의 핵심 정보를 한 곳에 묶어 통합 처리할 경우엔 환자에게 최고 90%까지 비용 절감 혜택이 돌아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IBM은 현재 '스마터 플래닛'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각국 정부와 기업, 학계, 사회 단체 등과의 협력을 추진중이다.
만약 '스마터 플래닛'이 전세계 각국에 보급된다면, IBM은 천문학적 규모의 사업수주와 수익창출을 이뤄낼 수 있다. 이는 곧 전 세계의 주요 시스템을 'IBM식'으로 바꿔가겠다는 어마어마한 의미도 지닌다.
IBM 관계자는 "똑똑한 시스템들은 국가나 도시 차원에서 성장 동력을 되살리고 글로벌 경쟁력을 향상시켜 경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며 "이 시스템을 공공 서비스 영역에 적용할 경우엔 한정된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은 물론, 관련 민간 기업의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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