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돼지인가. 수년 전부터 세계보건기구(WHO)는 조류 인플루엔자의 세계적 창궐 위험을 목청 높여 경계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현실화한 공포는 조류가 아닌 돼지 인플루엔자여서 의외라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보기에 돼지를 통해 사람끼리 인플루엔자 감염이 시작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돼지는 흔히 '혼합통(mixing vessel)'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이러스가 잘 섞이는 숙주이기 때문이다.
통상 조류 인플루엔자나 돼지 인플루엔자는 감염된 동물과 직접 접촉한 사람에게만 약한 정도로 전염될 뿐 사람끼리는 더 이상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돼지는 돼지 인플루엔자 외에도 조류 인플루엔자, 사람 인플루엔자에 다 걸린다. 세 가지 인플루엔자에 모두 감염되면, 애초부터 유전자 변이가 잦은 바이러스들은 서로 유전자를 섞는 '유전자 재편성'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나타난 새로운 변종은 이제 사람끼리도 옮길 수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된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러스감염대응연구단 부하령 단장은 28일 "최근 급속히 퍼지고 있는 돼지 인플루엔자는 조류 인플루엔자와 사람 인플루엔자의 유전자를 모두 일부 포함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사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일부가 포함되면서 인간에 대한 감염성을 획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플루엔자의 감염 과정을 세포 수준에서 들여다보면,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에 존재하는 수용체와 결합해 세포 속으로 침투한다. 사람 세포의 수용체는 돼지의 수용체와 다르기 때문에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잘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종 바이러스에는 사람의 수용체를 공략할 수 있는 사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전자가 포함되면서 사람끼리 전염이 가능해진 것이다.
부 단장은 "20세기 최악의 전염병으로 꼽히는 1918년 스페인 독감도 조류 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퍼진 것이지만 돼지를 거쳐 변종을 일으켰다는 이론이 적지 않았다"며 "돼지를 매개로 한 인플루엔자의 변종 출현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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