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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신뢰와 배신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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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칼럼 멀리, 그리고 깊이] 신뢰와 배신의 윤리

입력
2009.05.02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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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을까 하는 데 대한 관심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신의 기원'에 관한 사색이라고 해도 좋을 그러한 것인데, 아득한 때부터 축적된 인류의 경험들을 살펴본 학자들은 이에 관해 무척 소박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종교란 이른바 원시인들이 자연재해와 직면하면서 경험한 공포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도저히 항거 불가능한 위력이 가하는 폭력적인 사태를 절망적으로 겪으면서 어쩌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그렇게 강하고, 그렇게 자의적(恣意的)인 존재가 있어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 데서 신이 출현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以前)'이라는 개념, 그리고 '원시(原始)'라는 개념이 함축한 문화국지주의적(文化局地主義的) 사색이 편견일 수 있다는 성찰이 비롯하면서 요즘에는 종교기원론을 전혀 다른 물음자리에서 되살펴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천둥 번개나, 화산의 폭발이나, 해일의 넘침 등만이 그들의 두려움이었을까? 그런 데서 말미암는 몸의 소멸에 대한 공포만이 신을 요청하게 한 것이었을까? 그들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들도 미움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들도 옳음을 좇아 그름을 저어하지 않았을까? 그들도 깨지는 신뢰에 고통을 받고 든든한 믿음을 통해 서로 의지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신은 오히려 인간이 겪는 온갖 '가슴앓이'를 위로 받고 또 치유 받고 싶은 희구 속에서 요청된 불가피한 존재이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기원의 문제는 실증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처음은 이러저러할 것'이라고 하는 물음주체의 형이상학적 전제가 좌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해야 현대의 종교학이 기원의 문제를 아예 파기해 버렸을까요. 아무리 진지해도 공론(空論)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기원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종교기원론 자체를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원시인들의 '가슴앓이'일 법한 것으로 지적된 사랑의 결핍, 옳음의 훼손, 신뢰의 상실 등이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근원적인 아픔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든, 옳음이든, 신뢰든, 그것은 모두 관계개념입니다. 홀로 산다면 전혀 필요 없는 덕목들입니다. 하지만 더불어 산다면 그 덕목들은 그대로 그 삶 자체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바르지 못하면, 신뢰할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찢어진 그물처럼 폐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움과 그름과 불신은 가장 참혹한 삶을 묘사하는 두려운 용어들입니다. 산다 해도 그러한 삶은 삶이 아닙니다. 사람살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신뢰는 어쩌면 다른 덕목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관계를 이루는 그 얼개 자체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미움도, 옳음이나 그름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구조가 선행(先行)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절망적으로 사회의 불안을 묘사할 때 사랑이 없는 사회라든지 불의가 성한 사회라든지 하기보다 신뢰가 땅에 떨어진 사회라든지 불신이 팽배한 사회라고 묘사합니다. '믿을 것 아무 것도 없다'든지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자조적(自嘲的)인 탄식은 절망을 경험한 사람의 자학이 뱉는 '마지막 발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나친 과장일는지 몰라도, 우리는 지금 그렇게 발언하고 싶은 답답한 정황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어떤 제도도, 어떤 경험도 신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표가 불투명하다든지,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든지, 보상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든지 해서만 이러한 불신이 우리의 풍토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이 꽤 온전하게 마련되어 있는데도 신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까닭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배신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우리는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경제에서도 그랬습니다. 학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에서조차 그러했습니다. 언론매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너의 배신도, 너희들의 배신도, 그들의 배신도 겪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도 들지 않은 채, 이렇게 어떤 사실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일반화하는 일은 조심스럽습니다. 얼마든지 긍정적인 경우를 예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외적인 것'에 의한 일반화는 그것이 아무리 낙관적인 기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해도 분명한 기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태는 진정으로 답답합니다.

그런데 서로 신뢰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삶입니다. 신뢰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존재법칙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신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제도와 역사와 미래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 객체들이 모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 한계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는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이 완전하게 갖추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승인이고 수용입니다. 신뢰는 근원적으로 '~에도 불구하고'가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어쩌면 무조건적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내가 신뢰하는 객체나 대상이 나를 배신할 거라고 하는 예상을 충분히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뢰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뢰의 수행(遂行)은 엄청난 자기 손실을 스스로 다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야 가능한 일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랬을 때 비로소 나는 신뢰의 책임주체가 되면서 동시에 배신에 대한 책임에도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신뢰를 준거로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일도, 신뢰를 제도화하여 사회적 자본으로 축적하는 일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뢰를 구현하기 위하여 언제나 배신의 현실성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배신을 예상하지 않는 신뢰는 유치합니다. 그리고 배신을 책임지지 않는 신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신뢰가 관계개념이듯 배신도 관계개념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그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간이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신뢰의 붕괴를 탄식하고 분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뢰를 위해 배신의 아픔을 마디마디 견디며 품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아픔이 오죽했으면 인간은 그 마디에서 신을 요청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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