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을 앞두고 도덕적 파산을 자인하며 스스로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가족 문제는 사실관계를 따질 여지가 있으나, 오랜 친구이자 분신인 정상문씨가 그를 위해 한 일 때문에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되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구구한 변명은 접고 그동안 해명과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해왔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의 문도 닫겠다고 했다. 폐쇄를 반대하는 지지자들의 애정 어린 댓글이 쏟아지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을 정치적 상징이나 구심점으로 얘기하는 것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ㆍ도덕적 파산의 결과로 사법적 심판대에 서는 것을 보는 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든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경우,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노무현은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다"며 재임 시절 열렬히 옹호하고 전파했던 가치까지 던져버린 것이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라는 말은 자신의 과오를 덮고 자책 혹은 회한을 드러내는 표현으로는 자못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분열적이고 이중적인 개인적 처신이 초래한 정치 파산을 정책과 가치의 파산으로 몰고 간 그의 태도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이단적인 비주류 정권의 탄생에 따른 정치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줄곧 이어지고 경제사회적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당사자가 그 유산과 공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태는 국민들을 너무 초라하게 만든다.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우리 사회가 신기루를 좇아 다녔고, 허깨비와 헛씨름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 등 생각이 짧고 방법이 치졸하긴 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해방 이후 근대사의 전개과정에서 퇴적된 인적ㆍ물적 찌꺼기를 걷어내고 역사의 강줄기를 정화하려는 나름의 의지를 가졌던 것마저 부인하기는 어렵다. 탈지역적 정치질서, 개헌, 동반성장, 균형발전, 남북 화해와 공존, 부동산투기 근절, 일하는 복지, 비전 2030, 해밀턴 프로젝트, 스웨덴식 노사모델, 교육ㆍ의료 개혁 등등 그의 시대에 제기된 의제들은 지속 가능한 국가발전을 위해 반드시 걸러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동원한 용어는 과격했고 태도는 불량스러웠으며 관계는 적대적이었다. 때로 그런 언행들이 정책 추진의 결정적 걸림돌이 되는 자가당착을 범하기도 했으나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시대정신'의 그릇에 담긴 가치마저 배척할 것은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서 '포괄적 뇌물죄'를 다투며 피의자의 권리를 강조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된 처신과 함께 매도 당하는 정책과 가치에 무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보수정권에 의해 이미 절반 이상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이런 가치들을 범죄와 동격으로 묻어버리면 안 되는 이유는 또 있다. 그 가치와 정책에 휘둘려온 관료사회의 당혹감과 무력감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 군사정권에서 민간정부로 이행된 이후 5년마다 되풀이되는 관료사회 청소작업은, 진보정권에서 보수정권으로 넘어오면서 '공무원의 영혼' 운운하는 것마저 사치스러운 일이 됐다.
최근 만난 한 전직 고위관료의 말은 인상적이다.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애써 길러놓은 사람들도 정권이 바뀌면 추풍낙엽이다. 전 정권에서 잘 나갔다는 이유 한 가지다. 특히 세계경제가 통합돼 위기와 기회가 순식간에 확산되는 현실에서는 이메일이나 전화 한 통화로 문제를 푸는 네트워크와 전문성을 갖춘 글로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데 실상은 정 반대다. 사정이 이러니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이며 한국의 존재감은 어디서 생기겠느냐."
얼마 전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정권에 의한 관료사회의 피폐화와 사회 전체의 인재 고갈을 막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크게 주목 받지 못한 제안이지만, 노무현 시대에 그의 가치와 정책 구현을 위해 뛰었고 뛸 수밖에 없었던 전ㆍ현직 관료들은 누구보다 공감을 느낄 법하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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