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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56> '대머리 집' 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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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56> '대머리 집' 을 아시나요

입력
2009.04.2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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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이 50대 이상으로 신문 방송의 기자 PD 또는 직원이었거나 문화예술계에 종사한 사람에게 "대머리 집을 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 사람은 '짝퉁'이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도 이 집은 다 안다.

이 집의 원래 본명은 '명월옥'이다. 명월이나 대머리나 같은 말이니까 그냥 대머리 집이 훨씬 정감이 있지 않은가? 정부종합청사 뒤로해서 서울경찰청 정문을 지나 100m 남짓 가다 보면 사직공원 앞 큰길이 나오기 전 왼편에 골목이 있고 그 곳에 '대머리 집'이 있었다.

1981년인가 문을 닫았으니까 그때까지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집이다.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나라에 주막이라는 술집이 있었으니까 이 집을 최초의 대포집이라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근세의 초기 대포집인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그 집 주인에게 들은 바로는 초대 주인은 태껸 고수였다고 한다. 머리가 벗겨진 관계로 대머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들인 두 번째 주인도 역시 앞머리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두 번째 주인에겐 아들이 없어서 딸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는데 그 딸은 부엌에서 주방장 역할을 하고 사위가 사장이 된다.

사장이 된 사위도 공교롭게 머리 숱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손님들은 그를 '이형' 또는 '이씨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3대 대머리인 것이다. 내가 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957년 대학 다닐 때부터였다. 슬레이트 지붕 앞으로 비를 맞지 않게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위로 호박넝쿨이 올라가고 있던 그런 정다운 집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자로 된 '명월옥'이란 간판이 있다. 얼핏 보면 다른 집과 별로 다르지 않은 술집 같은데 "이 집이 왜 유명할까?"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제부터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진다.

첫 번째 이유는 외상을 잘 준다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외상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신문 방송 종사자 또는 문화계 인사들 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등에게 외상 특권(?)을 주었다.

외상장부도 없다. 어디다 사인하는 것도 아니다. 술 마시고 "이형, 나 가요"하고 나오면 그게 외상이다. 이형은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모른다.

한번 본 사람은 거의 이름까지 기억하곤 했다. 그뿐 아니라 술 마시고 "나 가요"하고 나왔는데 그 다음 달 외상 값 받으러 신문사 편집국에 올 때보면 조그만 쪽지에 어김없이 깨알처럼 액수가 적혀 있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신문사(한국일보)에는 월급날 아무도 외상 값 받으러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예외였는데 대머리 집의 '이형'과 불고기집 '평양옥'의 영숙이었다. 평양옥은 조계사 건너편에 있던 식당인데 몇 년 영업하다가 문을 닫았다.

어쟀든 매달 11일과 26일에 어김없이 '이형'은 나타난다. 그 당시 우리 회사는 월급을 한 달에 두 번으로 나눠서 지급했기 때문이다. 키가 작달막하고 인자하게 생긴 이형은 조용히 옆에 와서 조그만 목소리로 "이번에 얼마 갚을 수 있어?"라고 묻는다. '얼마 갚아라'가 아니라 '얼마 갚을 수 있어'다. "이번 달에는 돈이 없는데 봐 주슈"라고 하면 "해만 넘기지 말어" 하곤 간다.

손바닥만한 종이쪽지에는 기자들 이름이 있고 그 아래에 외상 액수를 적었는데 형편 되는대로 일부를 갚으면 된다. 요즘 식으로 보면 할부인 셈이다. 외상값을 다 갚지 않았어도 그 다음에 가면 또 외상을 준다.

언젠간 한번은 신문기자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이 대머리 집에 와서 술을 마셨는데 '이형'이 외상을 주었다.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형'은 이렇게 말했다.

"신문이나 방송쟁이들은 한 두어 달 놀고 나면 또 다른 신문이나 방송사에 들어갑디다. 그 때가서 돈 받으면 되지 뭐" 이러니 이 집이 유명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한테서 외상 술값을 떼어 먹는다면 그건 죄악이다.

이 집에 들어가 앉으면 가로 60cm 세로 40cm 정도 되는 흑판에 하얀 분필로 쓴 메뉴판을 들이 민다. 이 흑판이 또한 명물이다. 조개탕, 파전, 동그랑땡, 빈대떡, 꽁치구이, 은행, 호박부침 등등이 적혀 있다. 안주가 다 팔리고 없으면 그 안주이름을 지우개로 지우지 않고 엑스(X)자로 그어 놓는다.

왜냐면 '이런 안주도 있으니 나중에 올 때 시키시오'라는 배려인 것이다. 이형보다 나이가 약간 많은 남자분이 있었는데 모르는 이들은 그가 주인인 줄 오해한다. 그도 역시 머리숱이 적은데 이 집에서 30년간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대머리 집이 유명해진 두 번째 이유는 '정보통' 이라는 것이다. 신문사나 방송국이 보너스 주는 날을 이형은 알고 있다. 월급날도 아닌데 갑자기 '이형'이 신문사에 나타나면 그날은 어김없이 보너스가 나오는 날인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걸 그는 알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곳이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언론계와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공무원들이 만나서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나는 각계각층 사람들과 이곳에서 자주 만나곤 했는데, 이봉춘, 원형걸, 김관현, 김유생, 최재웅, 정의명, 이상벽 등등 동료 또는 후배 기자들과 임영웅, 이낙훈, 김동훈 등 연극인들, 길옥윤, 이봉조, 김강섭, 김인배, 전우, 나규호 등 대중가요 작사 작곡가, 최희준, 위키리, 박형준, 유주용, 남일해 등 가수들이 이 집을 찾았다.

공무원으로는 문공부의 이종덕이 있었고, 미술계 인사들과 클래식 음악인들도 많이 드나들었는데 '비목' 작곡가 장일남은 큰 단골이었다. 이곳은 수준 높은 사랑방 구실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리운 것이다.

1979년쯤인 것 같다. '이형'은 나한테 고민거리가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는데 그들이 "이제 제발 대포집을 그만두고 쉬시라"고 강력하게 요구한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뜻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나는 매우 섭섭했다. "대머리 집은 이형 개인 것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하기 싫다고 함부로 문을 닫지 못합니다.

만일 이형이 안 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맡아서 꾸준히 가야 합니다" 라고 항변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어코 문이 닫혔다. 그리고 '이형'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자꾸 없애지만 말고 어디 한군데 이런 곳이 남아 있으면 어떨까? 광화문 근처에 "대머리 집"을 부활시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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