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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획자 키우는 대안학교 '로드 스꼴라'/ 여행 수업…길섶에서 세상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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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획자 키우는 대안학교 '로드 스꼴라'/ 여행 수업…길섶에서 세상을 배우다

입력
2009.04.2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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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짝쿵짝 쿵쿵짝짝!"

27일 오후 전북 진안군 백운(百雲)면. 이름처럼 하얀 구름이 조용히 떠가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난데없는 북소리가 울렸다. 노란 티셔츠를 맞춰 입은 학생들이 브라질 퍼커션을 연주하며 마을을 돌자, 집안에 있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녹슨 대문을 열고 뛰듯이 나온 정희순(72) 할머니는 "조그만 것들이 어쩜 저렇게 대견하냐"며 굽은 허리를 펴고 어깨를 들썩였다. 빨래하다 나와 고무장갑을 낀 채 장단을 맞추는 할머니도 보였다. 16명의 연주자들과 노인들은 엉덩이를 흔들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노란 옷의 연주자들은 이 곳에서 현장 수업 중인 대안학교 '로드 스꼴라' 학생들. 이들은 마을에 첫 발을 디딘 지난 16일 마을체험관에 어르신들 모셔다 서툰 솜씨로 국수 삶고 화전 부쳐 잔치를 열었다.

잔치 흥을 돋우려 브라질 퍼커션 연주도 곁들였다. 이날은 첫 퍼커션 연주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던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앙코르' 공연이었다.

로드 스꼴라는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와 사회적 기업 '맵(MAP)'이 손잡고 3월 문을 열었다. 학교 이름은 영어 로드(roadㆍ길)와 라틴어 스꼴라(scolaㆍ학교)를 합친 말. 이름 그대로 학생들의 배움터는 '길'이다.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길로 상징되는 더 넓은 세상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교류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의미다.

로드 스꼴라는 대안학교들도 대학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 '대안'으로, 여행 기획자를 길러내는 대안적 직업학교를 구상하며 만들어졌다. 대상은 15~22세, 2년 4학기 과정에 인턴 1년을 합쳐 3년을 마쳐야 어엿한 여행 기획자가 될 수 있다.

첫 학기 길머리과정이 바로 '진안 프로젝트'다. 2006년부터 '마을 만들기'사업을 펼쳐온 진안군과 손잡고 진안의 역사를 기록하고 유명 관광지가 없는 진안에서 눈길 끄는 여행 코스를 개발하는 것 등이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16명의 학생들은 현장 출동에 앞서 3월 한 달간 서울 하자센터에서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 각종 수업을 받았다. 여행 길잡이에게 필요한 영어와 환경 교육, 책 읽기, 글쓰기, 걷기 교육이 이어졌다.

지난 1일부터 열흘간은 지리산에서 진안까지 숲길을 따라 200㎞를 걷는 '몸풀기' 과정을 거쳤고, 잠시 휴식을 한 뒤 16일부터 진안에 머물며 현장 수업을 해왔다.

학생들은 4개 팀으로 나눠 과제를 수행했다. 한 팀은 주민 인터뷰를 통해 마을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했고, 다른 팀은 직접 그림을 그려 여행지도를 만들었다. 또 다른 두 팀은 여행 소개서를 만들고,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보여행 코스를 개발했다.

틈틈이 사람이 그리운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주는 일도 '배움'의 하나였다. 고담(17)양은 "영화감독이 꿈인데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인생을 살면 영화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 이 학교에 지원했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여행이 진짜 여행인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들의 일손도 돕는다. 모판짜기와 옥수수 새싹 구멍내기에 아이들 도움을 받은 전영자(69)씨는 "혼자 했으면 며칠이 걸려도 못할 일을 2시간도 안 걸렸다"며 좋아했다.

24시간 공동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함께 어울려 나누는 법도 자연스레 익힌다. 한 번은 한 학생이 인터뷰를 하던 할머니에게 "저희 숙소에서 점심 드실래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웃 할머니 6명을 이끌고 10분만에 숙소로 들이닥쳤다.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밥 하고 만두 찌고 돼지고기 볶고 샐러드 만들어 점심상을 차렸고, 식사 후엔 '다방커피'까지 대접했다. 전쟁터가 된 부엌은 뒤로 한 채 아이들은 이내 고사리 캔다며 할머니들과 함께 들판으로 나섰다.

김현아 교사는 "혼자 30인분의 밥을 차려낼 수 있다면 여행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면서 "남이 먹을 밥을 차려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작업은 세계 어디서든 낯선 사람과 만나서 말을 걸고 쉽게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경청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 '길 위의 삶'이 불안하지 않느냐는 '우문'을 던져봤다. 학생들은 당당했다.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 휴학하고 왔다는 백현주(21ㆍ여)씨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먹고 살 순 없을까 고민하다 로드 스꼴라를 만났는데, 여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했다.

이들이 머무는 백운면 나들목 체험관의 김양숙(44) 사무장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서 그런지 아이들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며 "고등학교 2학년 아들도 이 아이들을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진안 프로젝트의 마지막 관문은 5월1일부터 사흘간 진행하는 도보 여행이다. 청소년 참가자 10명과 함께 그 동안 만든 여행서와 여행지도를 들고, 직접 개발한 여행코스를 걸어보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성과를 점검하고 여행 기획자이자 길잡이로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다. 이들은 5월 한 달간 서울에서 마무리 작업을 거쳐 성과물을 출판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진안=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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