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아파트, 충정아파트, 안산맨숀, 남아현아파트….
아직 공동주택이라는 것이 생소하던 시절 서울에 세워진 1세대 아파트들이다. 채 몇십 세대 되지 않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연립주택에 가까운 것들이다. 낡을 대로 낡아 재개발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철거되고 있다. 이것들은 그저 오래된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일까. 사제지간의 건축학도가 이 아파트들을 웅숭깊이 바라본 시선이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효형출판 발행)로 묶여 나왔다. 대한민국>
"한옥 단지나 옛 골목길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많아도 오래된 아파트의 가치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러나 1950~70년대에 세워진 아파트에는 지금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미들이 있어요. 노후했다는 이유만으로 철거해 버리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고 장림종 연세대 건축학과 교수와 제자인 박진희(30ㆍ사진) 연세대 건축공간계획연구실 책임연구원. 장 교수는 이 책을 한창 집필하던 지난해 갑작스레 별세했다. 박 연구원은 스승이 중간쯤 쓰다 만 서문을 이어받아 '아파트의 깊이는 깊다… 아파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층위를 통해 축적돼 온 문화'라고 조심스레 써서 권두에 붙였다.
"30, 40년 전 건축된 아파트에는 공동체를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주민들이 함께 가꿀 수 있는 화단이 있고, 반상회를 열 수 있는 마당이 있고, 같이 빨래를 널 수 있는 공간도 있어요. 미학적 고려도 뛰어납니다. 지금은 아예 동네를 밀어버리고 새로 아파트를 짓지만, 옛 아파트는 대지와 길거리를 고려해 다양한 형태로 건축됐어요."
이 책에는 그저 낡았다고 치부했던 옛 아파트가 지닌 미감, 세월의 깊이가 새겨진 그곳에서의 삶의 풍경이 세세히 기록돼 있다. 또 문학과 미술, 영화 속에 비친 1세대 아파트들의 모습이 전설처럼 묘사돼 있다. 박 연구원은 그것을 "적층된 시간의 켜"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 아파트들을 보존하자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건축사적인 의미를 단정짓기도 힘들죠. 하지만 전시 공간이나 창작 스튜디오 등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도 가치가 있을 거고요."
생전의 장 교수는 늘 이 책을 쓰는 것을 '숙제'라고 말했다고 박 연구원은 전했다. 스승의 숙제를 결국 제자가 마무리했다. "어릴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지만 이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솔직히 옛 아파트들은 참 생경한 풍경이었어요. 교수님을 한참 따라다니고 난 뒤에야 그분이 느끼는 의무감을 이해하게 됐죠. 교수님 숙제요? 교수님은 제게 늘 후하셨으니까 그냥 웃어주실 것 같은데요."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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