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찰의 힘으로 신흥국이 선진국을 눌렀다."
미국 워싱턴에서 25일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총회에서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총재가 채권 발행 계획을 밝혔다. 채권 발행은 IMF가 1944년 창설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AP통신은 "IMF 재원 확충 방안을 둘러싼 선진국과 신흥국의 힘겨루기에서 신흥국이 승리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IMF에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 정부도 신흥국의 의결권 확대를 포함한 IMF 개혁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IMF 내 신흥국 발언권의 강화가 예상되는 사례들이다.
이번 총회의 최대 의제는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IMF 재원 확충 방안이었다.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은 회원국별 재원분담금을 늘려 장기자금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신흥국은 IMF가 채권을 발행하면 그 채권을 인수하는 방법으로 재원 확충에 참여하겠다고 주장했다.
신흥국들은, 발언권은 그대로인 채 돈만 장기간 묶어두어야 하는 재원분담금 확충보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되팔 수 있는 채권 매입을 훨씬 유리하게 받아들였다. IMF에 근무한 에스와르 프라사드 미국 코넬대 경제학과 교수는 "분담금 확충과 채권 발행에는 상징적 차이가 있다"면서 "주요 신흥국이 선진국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AP통신에 설명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가에 대출하기 위해 조성한 IMF 긴급구호자금은 모두 2,500억달러. 하지만 최근 많은 나라가 손을 벌리면서 현재 500억달러만 남아 있다. 긴급구호자금의 고갈을 막기 위해 G20 정상회의에서 5,000억달러를 증액하기로 합의했지만 선진국들은 이 가운데 3,250억달러만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채권을 발행하면, 경제위기에 빠진 약소국의 채권 가격이 하락해 위기 탈출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IMF가 신흥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중국은 IMF가 채권을 발행하면 400억달러 어치를 즉시 구매하겠다고 밝혔으며 인도는 100억달러 구매를 적극 고려 중이다. 브라질, 러시아도 이번 총회에서 채권 매입 의사를 분명히 했다.
스트로스 칸 총재가 "IMF 발행 채권 수익률은 IMF 특별인출권(SDR)에 연동될 것"이라고 밝힌 점도 신흥국의 성과다. 중국, 러시아 등은 기존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SDR을 새 기축통화로 사용하자고 주장해왔다. 특히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 중국은 달러가치 변동에 따라 국가 경제가 큰 영향을 받는다며 달러 기축체제를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유럽, 일본과 달리 미국이 IMF 내 신흥국 발언권 확대에 적극적인 점도 신흥국에 고무적이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25일 "IMF는 세계경제현실의 변화를 조직운영에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역동적인 신흥국의 경제를 반영해 이들의 지분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이트너는 그 방안으로 IMF 이사회에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의석을 현재대로 유지한 채 전체 의석 수를 2010년까지 현행 24석에서 22석으로, 2012년까지는 20석으로 줄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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