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7시 충북 옥천군 옥천읍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 3층 옥상. 복지관측이 지역 장애인들을 위해 마련한 자선공연 특설무대에 '꼬마 손님'들이 떼지어 올랐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아래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들고 나타난 아이들은 눈빛을 주고 받더니 밝은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기쁨의 노래' '사랑의 인사'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등 귀에 익은 선율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150여명의 장애인과 가족들은 숨을 죽였다.
아내와 사별한 뒤 10년 넘도록 혼자 살고 있는 지체장애 2급 이만종(74ㆍ옥천읍 신기리)씨는 "꼬맹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예쁜 소리를 내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며 "외지에 나가 사는 손주들이 그립다"고 했다.
협주곡 '과수원 길'에 맞춰 박수를 치고 춤을 추는 지체장애 아들(20)을 바라보던 김모(49ㆍ여ㆍ보은군 삼승면)씨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사는 아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봐요. (보은에서) 먼 길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인들에게 '행복한 밤'을 선사한 아이들은 옥천군 군북면 증약초등학교 연주단이다. 전교생이 53명인 이 산골학교는 학생 누구나 1개 이상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룬다. 3학년부터 모두 연주단원이다.
요즘 들어 외부 초청이 줄을 잇고 있는 이 학교는 음악을 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전교생이 여느 학교보다 1시간 빠른 오전 7시 30분까지 등교해 매일 수업시작 전 악기를 배우는 것이다. 아침 일찍 악기를 배우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2007년 3월 당시 교장으로 부임한 이은자(60) 옥천교육장은 학부모 면담 자리에서 문화적으로 소외 받고 있는 산골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악기를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이왕이면 실력 있는 전문가에게 아이들을 맡기려고 도시지역 유명 음악 강사들을 접촉했다.
그러나 이름있는 강사들은 대전이나 옥천읍내 학원에서 일하거나 개인 레슨을 다니기 때문에 오후에는 학교로 부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침 이른 시간을 택해 강습료를 조금 더 주고 외부 강사를 초청하게 됐다. 강습은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3가지.
새벽에 농사일을 시작하는 학부모들은 일과에 맞춰 아이들이 일찍 학교에 가는데다 도시 학원에나 가야 접할 수 있는 악기를 배우게 되자 아주 흡족해 했다.
음악으로 아침을 열면서 적막했던 산골 초등학교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릴 없이 몰려다니기만 하던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플루트를 시작한지 3년째 접어드는 김태희(10ㆍ4년)양은 "TV에서나 보던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게 된 게 꿈만 같다"면서 "요즘에는 친구들끼리 경쟁이 생겨 2,3개 악기를 한꺼번에 배우고 있다"고 자랑했다.
학교측은 아이들이 실력을 발휘할 자리를 만들었다. 전교생이 악기 배우기를 시작한 지 3개월여 만인 2007년 6월. 학교 인근 증약리 마을회관에서 마을 어르신과 학부모 70여명을 모셔놓고 갈고 닦은 솜씨를 뽐냈다.
간단한 동요만 소화할 정도로 어설픈 실력이었지만 어른들은 환호하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앵콜까지 이어지며 첫 연주회는 '대 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을 얻은 학교측은 이백리, 추소리, 대정리 등 군북면내 각 마을을 도는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가는 곳 마다 농사일에 지친 주민들을 위로하는 한마당 잔치가 펼쳐졌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고 때때로 연주회를 다니면서 증약초등학교 학생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소문은 퍼지면서 지난해부터는 옥천군내 사회복지시설 등으로부터 초청이 들어와 정신요양시설인 부활원과 옥천노인회관 등에서 미니 콘서트 형식의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이진혁(12ㆍ6년)군은 "무대에 자꾸 섰더니 나도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며 "복지시설을 돌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도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증약초등학교는 올해 옥천군과 군교육청으로부터 1억 2,000여만원을 지원 받아 가상 영어체험 공간 등 주제별 영어실습실을 갖추고 원어민 교사도 확보했다. 3월부터 아침에는 악기 연주를 오후에는 과외로 영어를 배우고 있다.
방과후 학습지도 담당 권혜숙(35) 교사는 "아이들이 공연을 통해 자기 표현력이 향상되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며 "우리학교의 악기 배우기가 사설학원 없이도 특성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과후 학습의 한 모델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옥천=한덕동 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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