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을 빠져 나와 진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충무로. 건널목에 선 나는 충무로 길을 바라보며 늘 멈칫멈칫하곤 했다. 충무로! 과연 길 건너 저 안엔 무엇이 있을까? 신비한 마술의 세계?
너무도 궁금해 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 발길을 떼었다. 조심스럽게 길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기묘하게 보였다. 작은 구멍가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충무로 거리를 한 번 둘러보긴 했지만 다시 가보기엔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셋째 형이 영화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나를 데리고 간 것이다. 그 회사는 내가 늘 건널목에서 주저하며 바라보던 충무로 초입 2층 적산가옥, 바로 그 곳에 있었다. <합동영화사> 라고 쓰여 진 작은 나무간판이 입구에 걸려 있었다. 합동영화사>
그렇게 '길을 튼' 나는 시간만 있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찌그덕거리는 나무계단 소리마저 나를 한층 들뜨게 하였다. 형 친구는 영화 포스터를 그리는 그 회사 미술 부장이었다. 책상 몇 개 밖에 없는 사무실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했다. 모두가 감독, 시나리오작가, 촬영기사, 배우들 같았다. 내 눈과 귀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그런 내 귀에 늘 크게 들리던 소리가 있었다.
'꽉- 꽉-' 내가 형 친구에게 물었다. "저렇게 시끄럽게 소리치는 사람이 누구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꽉꽉이지". 나는 그의 말뜻을 몰라 눈만 껌벅이며 소리 나는 칸막이 안을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본 것은 그 후 얼마가 지나서였다.
새벽같이 회사로 오라는 제작부의 연락을 받고 사무실 문을 막 열고 들어설 때였다. 칸막이 뒤에서 군용침대에서 자고 있던 한 남자가 문 여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침대를 접고는 내 앞을 바람같이 스쳐 지나갔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미남이었다. 그가 바로 한국영화계의 반세기를 뒤흔든 곽정환이었다.
자유당 시절 임화수를 비롯한 주먹세계가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를 5ㆍ16 군사혁명군이 쓸어버린 후, 1960년대초 충무로 변혁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육군 장교 출신의 곽정환. 그는 매사를 전쟁 중 군인처럼 처리했다.
사랑, 영화, 부귀영화, 어느 하나도 치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사랑도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실천했다. 결혼도 전쟁처럼 치러냈다. 어느 한 여배우에 요즘 말로 '필'이 꽂혔다.
그 대상은 극동영화사에서 신인 공모하여 뽑은 <난의 비가> 여주인공 고은아. 그녀는 문희, 남정임과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새로운 스타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는 빨랐다. 그녀를 <소문난 여자> 에 기용한 후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소문'을 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고은아는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문난> 난의>
15세 연하라며 영화계와 언론이 안타까워하는 사이에 그는 재빠르게 그녀 자리를 다른 스타로 채워 넣었다. <청춘극장> 신인 여배우 공모로 등장한 윤정희가 새 트로이카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고은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집안에 들어 앉혔다. 청춘극장>
한국영화제작 223편. 한국영화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한국 영화인이라면 그와 함께 작업을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의 첫 출연영화도 그가 제작한 <한 많은 대동강> 이다. 나의 포트폴리오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첫 출연 작품이다. 한>
20개 영화사 외엔 영화를 제작할 수 없던 시절, 내 첫 감독 작품 도 그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 나는 그와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그에 대한 비난이 들려와도 나는 피식 웃어넘긴다. 어쩌다 방범대원한테 걸려도 '저, 고은아 남편인데요. 한 번 봐주세요.' 라며 너스레를 떠는 그를 생각하면 웃음이 안 나올 수 없다.
우리 영화계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다. 문제가 있는 곳에 늘 그가 있었다. 영화제, 영화인 단체선거, 극장요금, 영화인 인건비, 영화정책 등 영화에 관한한 그가 있으면 문제가 생기고 그가 없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설사 법을 어겨서 번 돈이라 해도 영화에, 극장에 모두 투자했다.
한번은 그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미납하였다고 법정에 선 적이 있다. 방청을 하고 있던 내가 안타까워 그의 변호사를 만났다. 곽정환 회장은 극장주이기 이전에 한국영화를 200여 편 제작한 영화제작자라는 것을 강조했다. 영화인들이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결국 재판부는 그가 한국영화에 공헌한 점을 참작하여 선처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를 외나무다리에서 자주 만났다. UIP 직배 반대 시위 때였다. 그는 시위에 동참하였지만 속으로는 극장주 纛恙【?돈벌이가 되는 직배를 반대 할 이유가 없었다. 동태를 보기 위해 참석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뒤에서 작은 소리로 불렀다.
"곽장로님." 그가 눈이 동그래져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장로라고 부른 것에 신경이 쓰이는 표정이었다. 그는 일찍이 연예인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 선교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돈 관리 잘 못하면 줬다가 다시 뺏는 거 아시죠." 그가 더 눈이 동그래졌다. "고롬. 알지. 고롬..."
그 일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소유하고 있는 전국의 극장은 다른 극장보다 1년 늦게 미국직배영화를 상영하였다. 영화법이 개정되고 <영화진흥공사> 를 <영상진흥공사> 로 개명하는 안건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였다. 영상진흥공사> 영화진흥공사>
국회통과를 앞두고 영화계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영화' 대신 '영상'이라고 포괄적인 표현을 쓰면 예산을 더 따 낼 수 있다는 속내가 있었다. 내가 반대에 나섰다.
'영화'라는 용어를 없애고 얼렁뚱땅 '영상'으로 통일하자는 발상 자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상진흥공사> 로 현판까지 만든 상태였다. 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반문화적인 작태라고 절규하였다. 이 때 그가 나를 동조하고 나섰다. "하감독 말이 맞다. 영화와 영상은 다르다. 영화의 독창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한국영상진흥공사>
그는 역시 해결사였다. 그가 나서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나 혼자 수많은 영화인과 정책당국자들과 맞서 싸우던 일을 그가 나서자 모두들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영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가끔 그가 생각나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얼마 전 그에게 전화를 했다. "영화제작 할래요?"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고롬. 책 좋은 거 있어?" 80의 그의 나이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의 '꽉-꽉- 소리'는 처음 내가 들었던 그 때처럼 패기로 넘쳐 있었다. 자, 우리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한 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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