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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버지의 쌀알' 낟알이 익을때 시드는 튼튼한 초록빛 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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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버지의 쌀알' 낟알이 익을때 시드는 튼튼한 초록빛 벼처럼…

입력
2009.04.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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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퐁 호 지음ㆍ최재경 옮김/달리 발행ㆍ352쪽ㆍ1만2,000원

'가문 날의 벼처럼/ 우리는 바짝 마른 들판에서 시들어 간다네./ 다른 이들이 우리의 물을 다 말려 버리는 동안/ 천천히 죽어갈 것을 기다리면서./ 벼처럼, 시드는 벼처럼/ 우리는 비를 기다리며 산다네.'(태국 민요)

1970년대 중반 태국 북부의 농촌마을 매쿵. 수백년 간 고율의 소작료를 내야 했던 사람들은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갓난아기인 조카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 마을 소녀 진다의 삶은 어느 날 송두리째 바뀐다. 매쿵 마을에 대학생들이 찾아오면서다. 진다의 첫사랑이 된 네드가 주동이 된 대학생들은 "진짜 병이 든 건 사회 전체"라며 높은 소작료에 저항하자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진다와 진다의 아버지 인톤은 운명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쌀알> 은 민주화와 농촌개혁의 바람이 태국 전역을 휩쓸었던, 그리고 그것이 군부세력에 의한 대학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던 1970년대 중반 태국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청년 엘리트들이 농민을 각성시키고 민주화 대열에 동참시키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인들이 비슷하게 겪어온 일이다. 1970년대 중반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한 대학 강사로 농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했던 중국계 미국인인 저자의 체험이 소설의 밑거름이 됐다.

총탄이 빗발치는 방콕의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는 진다, 소작료 저항운동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인톤, 평등과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대의에 투신하는 네드 등 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통과했던 인물들의 삶이 핍진하게 그려져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는 도식적 리얼리즘 소설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이 소설의 큰 미덕이다.

인톤의 장례를 치른 뒤 흘린 진다의 눈물은 지은이의 핵심 메시지가 아닐까. "아버지는 정의나 평등, 혹은 민주주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낟알이 익을 때 시들어가는 튼튼한 초록빛 벼들처럼,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원제 'Rice without rain'(1990).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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