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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주피스 공화국' 경마장 가는 길 지나 찾아간 낯선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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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주피스 공화국' 경마장 가는 길 지나 찾아간 낯선 공화국

입력
2009.04.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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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 지음/민음사 발행ㆍ296쪽ㆍ1만1,000원

<경마장 가는 길> (1990)로 대표되는 작가 하일지(54)씨의 이른바 '경마장 시리즈'는 1990년대 내내'한국 소설의 영토를 넓힌 미학적 탐험'vs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어설픈 모작'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새 장편 <우주피스 공화국> 은 <진술> (2000) 이후 그가 9년 만에 발표한 열번째 장편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예술가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답게 하씨에게는 이 소설 역시 언어와 소설문법의 실험무대다.

소설은 어느 추운 겨울날 '할'이라는 동양인 사내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입국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사내의 행선지는 이 나라 국경 근방에 있다고 알려진 '우주피스 공화국'. 할은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먼 나라인'한(Han)'에서 자랐으나, 우주피스 공화국이 주변국에 병합되는 바람에 오랜 망명생활을 한 사연을 갖고 있다. 우주피스 공화국의 독립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빌뉴스를 찾아온 할의 3일 간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이 곳곳에 출몰하고, 괴상한 일들이 잇따라 생긴다. 우주피스 공화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니 길을 빙빙 돌다가 우주피스 호텔에 내려주는 택시운전사, 우주피스란 '강 건너편'이라는 뜻이지 나라 이름이 아니라면서 할을 몰아붙이는 절름발이 블라디미르, '우주피스 공화국 국무총리'라는 우스꽝스러운 명함을 내보이는 술주정뱅이 토마스….

눈이 내리는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남겨지기도 하던 할은 우주피스 공화국의 관리를 자청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 공화국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곳은 제 자리다. 할의 여정은 데자뷰(기시감)의 형태로 반복된다. 가령 할이 여행 첫날 빌뉴스에서 요르기타라는 여인에게 보여준 엽서는, 다음날 우주피스 공화국의 수도라는 아듀티스키스라는 도시에서 만난 노파(가 된) 요르기타가 할에게 보여주는 엽서와 똑같다.

빌뉴스에서 아듀티스키스로 데려다 주는 택시기사는 할이 빌뉴스에 도착해서 만난 택시기사와 동일인이다. 하지만 작가는 번번이'할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식의 문장을 배치한다. 소설의 구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앞뒤를 구별할 수 없게 맞물려 놓으려는 속셈이다. 작가는 한 번 일어난 일을 여러 번에 걸쳐 서술하는 프랑스'누보로망'의 수법을 차용하고 있는 셈. 할은 과연 어떻게 이 미로를 탈출할 수 있을까?

치밀한 설계에 따른 순환적 얼개, 수식어를 배제한 문장, 부조리한 대화를 통한 이야기 전개,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거부, 환상적 기법을 통한 시공의 확장 등 기존 소설문법을 거부하는 실험을 통해 작가는'현재 속에 도달한 과거','과거 속에 도달한 현재'를 실감나게 그려낸다. 한국소설에서는 드문 이런 실험을 통해 작가는'인간의 몸은 기억의 집'이라는 명제를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06쪽)라는 할의 반문은 작품의 핵심 메시지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시집을 내기도 했던 하씨는 세계문학어로서의 한국어의 효용성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작가다. 감각적 흥미를 추구하기보다는, 고난도 퍼즐게임을 하듯 머리로 소설 읽기를 즐기는 독자들이라면 또 하나의 도전거리가 될 만한 작품.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하씨는 안식년을 맞아 요즘 강원 인제의 만해마을에서 새 장편을 쓰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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