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시작된 대한민국연극제가 1987년 서울연극제로 명칭을 바꾸고 2009년 3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연극의 질적 향상을 기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창작희곡의 발굴에 역점을 두었던 초심을 돌아보면서 그 동안의 참가작 중 9편을 선정해 한 달간 아르코예술극장을 중심으로 축제를 연다. 그 아홉 편 중 첫 번째 작품 이강백 작 '봄날'이 22일 막을 올렸다.
1984년 초연 당시 늙은 아비의 탐욕과 집착에 권력을 독점한 군사정권의 횡포를 비춰 읽었던 이 작품은 1997년 세계 연극제에서는 겨울과 봄 사이의 욕망과 의지의 쟁투,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보편성에 주목한 바 있다.
2009년 '봄날'은 극장 밖 현실과 공모하거나 연계할 수 있는 해석 여지보다는 오랜만에 대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공간의 시'를 향유할 수 있다는 기쁨이 컸다.
무대미술을 맡은 손호성은 나무를 이용해 원근법을 조절한다. 구렁이 똬리 틀듯 집 뒤 안을 감싼 감나무 둥치를 앞쪽에 내세우고, 가파른 고개 중동에는 한 그루 작은 나무를 심어 재 너머 공간감을 상상케 했다.
산그늘에 옴팡하게 숨은 초가 한 채는 적요하고, 수묵 담채로 물들인 배경막은 물굽이처럼 전면을 막아서는데 실(實)과 허(虛), 빔과 성김, 허처(虛處)와 여백을 담은 동양화의 구도로 살아난다.
극 머리는 상여의 꼭두를 장식하는 나무 수탉이 지붕 위로 솟아 도망을 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객의 설화적 세계로의 이입을 편안하게 마련해주는 장치다.
배우들은 무엇보다 덜어낸 말들에 대한 상상과 추정으로 귀 기울이게 하는 이강백 특유의 대사 맛을 잘 살려냈다.
어미의 빈자리를 대신해온 맏이를 맡은 이대연은 둥글고 부드러운 양감으로 존재감을 다투지 않으면서 무대를 자연스레 채우고, 아비로부터 찬탈을 주도하는 둘째 역의 장성익은 마임으로 다져진 동작의 확장과 응축으로 아비와 대립되는 아들들의 세계를 세련되게 조정한다.
더 이상 연약하기만 한 희생자가 아니라 관음보살의 현신처럼 차분히 안정감을 살린 김민선의 '동녀(童女)'도 새롭다.
특히 명료 단아한 화술로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경지를 보여준 아비 역의 오현경은 과한 욕망이 부리는 주책마저도 노추(老醜)가 아닌 천진성과 해학적인 능청으로 살려내 관객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그린 벤치', '여행',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등 희곡마다 필요로 하는 제각각의 미학적 요구에 폭넓게 조응해 가는 연출가 이성열은 희곡에 담긴 정수를 스타일화 하는 역량이 더욱더 견실해졌음을 보여준다.
노배우는 꽃보다 아름답고, 꽃구경보다 연극구경이 화사한 '봄날'이지만, 가는 봄처럼 짧아 아쉽다. 극단 백수광부. 28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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