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봄, 대한민국은 고민에 빠졌다.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일을 어찌 감당할지, 그가 나라를 통치한 5년 세월을 어떻게 소화할 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믿었는데…', 국민의 마음은 어지럽고 착잡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혐의를 '생계형 범죄'에 비유한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봉하마을 주민과 지지자들도 검찰과 언론의 표적수사와 편파보도를 비난하며 반발하지만, 민심은 철저한 진상규명 쪽에 쏠려 있다. 지금은 무작정 역성을 들 때가 아니다.
민주주의 성숙 위한 성장통
이번 일로 '386의 몰락'이라느니 '좌파의 부도덕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라느니 말이 많다. 과도한 일반화와 침소봉대의 혐의가 있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규정은 아니다. 참여정부 주역들과 대통령 주변 인사들이 잇따라 비리 혐의로 사법 처리되는 마당에 자기들만은 깨끗하다며 믿어달라던 이들은 이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전직 대통령이 비리혐의로 형사처벌을 받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대통령이 재임중이나 퇴임 후 이런저런 비리의혹에 휩싸이고 가족이나 측근이 처벌을 받은 경우는 훨씬 더 많다. 그러다 보니 국민도 만성이 돼버려 권력을 떠난 전직 대통령의 수난사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선진국에서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 수치스러운 일이 어째서 우리에겐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청렴을 모토로 내걸었던 전직 대통령이 뇌물 수수 혐의로 형사소추를 받게 되었으니, 혹시나 한국이 제3세계의 천박한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나라가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 비리는 이미 고질적인 '한국병'이 되어 버린 것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부정부패는 좌우도 없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청렴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너나 없이 자식문제로 시달렸고 경제적 후원자, 오랜 친구, 정치적 동지 등으로 불리는 숱한 측근 들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이런 위험성을 그들이 몰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정치인들은 끈끈한 정과 의리를 중시한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사람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청렴결백은 민주회복과 부패척결을 내세우며 투쟁을 벌였던 야당 지도자들도 간직하기 어려운 덕목이었다. 권력과 돈은 여야를 막론하고 자연스럽게 유착되었다. 유착의 핵심은 주고받는 데 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다', '친구의 일이라면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발 벗고 도와주는 게 도리'라는 식이다. 그리하여 비리 바이러스가 숙명처럼 권력에 붙어 다녔다. 위험을 알면서도 떨쳐내기 힘든 것이 대통령 비리의 본질이다.
그러나 대통령 비리는 난치성 한국병이라기보다 민주주의의 성장통에 가깝다. 그것은 '비밀은 없다'는 한류 정치의 진면목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깨끗한 정치지도자를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 축복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이번 사건을 통해 얻은 교훈은 현직 대통령은 물론 미래의 대통령 모두에게 적용된다. 국민은 또다시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국민과 역사 앞에 바로서야
역설적이지만 한국정치는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한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세계와 우리 후손들이 주목하고 있다. 이 고통을 잘 이겨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 단계 더 성숙할 것이다.
고통스럽겠지만 노 전 대통령이 역사와 국민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진실을 가감 없이 밝히고 자신을 믿어 주었던 국민에게 사죄하는 일이다. 이 모든 일들은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두려워도 회피할 일이 아니다. 역사 앞에 바로 서야 한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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