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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22> 사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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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시를 만나다] <22> 사령선

입력
2009.04.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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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선-이영주

칼을 내리칠 때는 숨을 멈추어야 해. 그녀는 곰팡이 핀 손가락 관절을 꺾습니다. 수백 개의 심장을 도려낼 때 말입니다. 아이는 동물의 심장으로 쑥쑥 자라네요. 시장 바깥을 빙빙 돌면서.

단 한 번의 힘으로, 정육점 밖으로의 비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어요. 속눈썹이 긴 돼지 눈은 언제나 밖을 향합니다. 그녀는 거울도 없이 냉장고 안쪽에서 눈을 감고

별 도장을 찍는 그녀의 손바닥이 별빛으로 물드는 것을 봅니다. 혀를 대고서야 별이란 뜨겁고 비린 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살이란…

그녀는 0.5평 진열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무도 자신을 본 경험이 없어요. 우주 공간에는 바닥, 천장, 벽도 없다는데 무중력으로 돌아오지 않는 항해를 하는 건가요.

거울 앞에 앉아 매일매일 축지법에 대한 책을 읽습니다. 단 한 번의 비행을 위해

잘 발린 안쪽 부위들을 진열하면서 아이는 손목에 별 도장을 찍어 봅니다. 이곳에는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령선이 떠 있습니다.

● 정육점의 여자는 0.5평의 냉장고 안쪽에서 눈을 감아봅니다. 언제나 밖을 향해 있는 우리의 눈동자는 눈꺼풀을 내리면 어디를 향해 비행을 시작할까요? 정육점의 아이는 단 한 번 정육점 밖으로의 모험을 감행해 본 적이 있습니다.

돌아온 아이는 거울 앞에 앉아 신비한 책을 읽고 있군요. 이제 아이는 정육점 밖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의 붉은 살 안쪽의 세계가 더 궁금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저는 밤길을 걷다가 우연히 우주선처럼 떠있는 환한 정육점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김행숙(시인ㆍ강남대 국문과 교수)

ㆍ이영주 1974년 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2009 세계천문의해 한국조직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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