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밖에 나가보면 산에 들에 예쁜 꽃들이 만발해있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들꽃들까지도 활짝 웃음을 지어줍니다. 그러나 우리 농촌에서는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지는 계절입니다. 일손이 많이 부족하거든요.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새벽에 밭에 나가 일을 하다 배에서 신호가 오면 들어와 밥 한술 뜨고 다시 소화도 되기 전에 발길을 옮깁니다. 겨우 내내 뽀시시 해졌던 살결이 또다시 검게 변해버리는 계절입니다.
농촌에서는 여자들이 남편들보다 더 바쁜 거 같아요. 일도 같이 하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청소 또한 여자들 몫이고…. 다른 가정은 몰라도 우리집은 유난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 남편 흉좀 보려고 합니다. 친정이나 시댁 가서도 흉을 볼 수가 없거든요. 오늘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쳐 보려구요, ㅎㅎㅎ.
남편이 꿈나라에 가 있을 이른 새벽에 저는 일어나 부엌으로 나옵니다. 쌀 씻어 밥솥에 앉히고 찌개를 끓여 점심까지 준비를 해놓은 뒤 빨래를 하고 있으면 그제서야 남편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는 정말 정신없이 바빠져요. 남편은 고추 모가 자라는 비닐하우스를 갈 때도 꼭 저를 데리고 갑니다. "여보, 하우스에 가자." "당신 혼자 가!" "어떻게 혼자 가?" "왜 못 가? 바로 코 앞인데 당신 길 몰라?" "심심 하잖아." "난 밥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바쁘잖아." "밥 하는 게 뭐가 바빠? 밥은 밥솥이 해주고, 또 빨래도 세탁기가 해주잖아." 이러니 뭐 할말이 있겠어요. 밥솥이 쌀도 씻어서 다 해주는 줄 알고 있으니…. 세탁기도 지가 다 알아서 빨랫감을 갖다가 돌려주는 줄 아는가 봅니다.
그렇게 티격태격 아침을 시작합니다. 안 가면 제가 나갈 때까지 밖에서 계속 잔소리를 합니다. 결국 쭐레쭐레 따라 나섭니다. 모종이 자라는 비닐하우스 네 동을 다 돌고 나면 어느새 아홉시입니다. 남편을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아침상을 차립니다. 남편은 밥을 다 먹으면 치우기도 전에 불러댑니다. "여보 뭐해? 빨리 안 오고." "보면 몰라요, 뭐 하는지? 먹은 건 치워야지!" "그냥 보자기 덮어두면 되지 뭘 치워. 점심 또 먹어야 하는데." 기가 막히죠.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요?
아침부터 실랑이 하기 싫어 밥 그릇을 그냥 물에 담가두고 반찬도 대충 냉장고에 넣고 또 따라갑니다. 일을 할 때도 뭐든지 같이 하자고 해요. 둘이 따로따로 하면 더 빠르고 쉬운 일도 말입니다. 자기는 줄을 띄우고 제가 김을 매면 될 일도 꼭 줄도 같이 띄우고 김도 같이 매자고 합니다. 어떻게 화장실은 혼자 가는지 모르겠어요. 점심 때도 따라 들어와서는 빨리 밥을 달라고 조릅니다. 이럴 땐 정말 미워요.
농촌에 살고 계시는 주부님들도 겪어 보셨죠? 바깥 일을 똑같이 하고도 밥이나 빨래는 여자 혼자 해야 하니…. 남자 여자가 하는 일이 딱 분리가 돼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침 설거지도 못한 채 점심 밥상부터 차려주고 나면 얼마나 빨리 먹는지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워버립니다. 그나마 제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다행이에요. 일부러 느릿느릿 먹고 있노라면 남편은 주방엘 몇 번씩 들락거리다 끝내 한마디 합니다. "아니, 무슨 밥을 하루 종일 먹냐?" "당신 먹을 때 난 상 차렸잖아." "그러게 대충 먹자니까." "그럼, 나 먹지 말까?" "아니, 어여 먹어. 찬찬히…."
상도 못 치우고 세탁기에 넣어둔 빨래를 꺼내 밖에 내다 널고 나면 남편은 또 여지없이 불러댑니다. "여보, 뭐뭐 어디 있지?" "여보, 이리 좀 빨리 와보라니까." "여보, 여보…." 도대체 하루종일 '여보'를 몇 번이나 불러대는지 모릅니다. 저녁 밥을 먹고 나서야 아침부터 쌓인 설거지 거리를 저녁상과 함께 치우고, 널어둔 빨래를 걷어 방으로 들여옵니다. 밤이면 눅눅해지거든요. 그리고 아침에 먹을 반찬 두 세가지 만들어 놓고 나면 밤 열 시쯤 됩니다.
그 시간에 남편은 뭐 하느냐구요? TV에서 방송하는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습니다. 아주 한가하지요. 얄미워서 TV 앞을 일부러 왔다 갔다 하면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도 바둑에서 눈을 못 뗍니다. 슬그머니 서운해져서 살짝 싸움을 걸어보기도 합니다. "기가 막혀. 당신 지금 뭐해?" "… …" "뭐하고 계시냐구요?(큰소리로 빽~~~)" "가만 있어봐. 아이고, 저거 다 죽었네." "지금 뭐 하냐구!!!(더 큰소리)" "조금 있으면 끝나니까 좀 조용히 해." "당신, 나 정말 화낸다?" "알았어, 알았어. 이거 끝나면 놀아 줄께." 기막혀서 참, 저를 놀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리모컨을 확 뺏어서 다른 방송으로 돌려 버려야 남편은 그제야 제 얼굴을 봐 줍니다. "빨리 돌려. 제일 중요한 땐데." "중요하긴 마누라보다 더?" "왜 그래? 하루종일 재미있게 일하고선." "재미? 지금 재미라고 하셨어, 당신?" "왜~그래, 또. 왜 심통이 났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이리 와. 어깨 주물러 줄께. 우리 저거 쪼금만 보자." 세상에, 그 와중에도 바둑에 미련을 못 버립니다. 제가 왜 화를 내는지조차도 몰라요. 하루종일 자기 뒤에다 나를 매달고 다녀놓고도 전혀 모릅니다.
아마 우리 군(郡) 전체에서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남편이 어디라도 가면 그날은 아주 자유부인이 됩니다. 내 맘대로 화단에 꽃씨도 뿌리고, 농장 주변도 예쁘게 단장을 하고, 깨끗하게 청소도 하고, 또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실 시간도 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랍니다. 어제 내린 단비로 제가 좋아하는 꽃씨라도 뿌리라고 하늘이 기회를 주셨나 봅니다. 남편이 예정에 없이 외출을 했으니, ㅎㅎㅎ.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 김옥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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