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공공기관 인터넷전화 도입 정책이 미국 업체들의 입김에 휘둘려 표류하고 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올해 세종로 중앙부처를 중심으로 정부의 유선 전화를 요금이 저렴한 인터넷전화(VoIP)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당장은 15만대의 전화기와 통신장비 교체로 15억원의 예산이 소요되지만, 내년에 과천 및 대전 정부청사, 지방자치단체로 확대되기 때문에 4,000억원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일부 미국 업체들이 통신장비 판매를 위해 정부의 VoIP 도입 계획 변경을 요구하고 있어 국내 업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통신 암호화 기술. VoIP의 경우 인터넷 선을 이용하다 보니 해킹을 통한 도ㆍ감청 문제를 피하기 위해 전화기와 통신장비 등에 암호화 기술을 적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정보원이 주축이 돼 암호기술 '아리아'를 독자 개발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2월 관련 업체들을 상대로 사업설명회를 갖고 아리아를 탑재한 장비에 한해 성능 비교 시험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LG노텔, 다산씨앤에스 등 국내 10여개 업체들은 많게는 수십 억원의 개발비와 수십 명의 인력을 투입해 아리아를 탑재한 전화기와 통신장비를 개발, 2월에 성능 비교 시험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시스코, 어바이어 등 미국 업체들은 아리아 대신 미국이 개발한 암호기술인 'AES' 사용을 요구하며 불참했다.
AES는 2000년대 초반 미국이 개발해 국제 표준으로 인정받은 통신용 암호화 기술. 업계에선 미국 업체들이 국제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속내는 아리아 탑재를 위해 돈을 쓰기 싫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VoIP에 AES를 탑재하면 국내 업체들은 수십 억원의 개발비를 고스란히 날리는 것은 물론, 관련 암호화 기술도 발전시킬 수 없다.
미국 업체들은 자국 정부까지 동원해 이를 통상 현안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미 무역대표부는 '조달 기관이 정하는 기술 규격은 국제 표준에 따라야 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 조항을 들어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최근 방한한 존 챔버스 시스코 시스템즈 회장도 정부 관계자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VoIP 도입을 주관하는 한국정보사회진흥원 관계자도 "미국 대사관에서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국내 업계에선 WTO 조항에도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항은 예외로 하고 있어 아리아 탑재가 통상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카멜리아'라는 독자 암호 기술을 사용하는 일본이 대표적이다. 그런데도 미국 측은 "국방부 등 안보 부처에서만 아리아를 사용하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고 있다.
이 바람에 5월 초 사업제안 공고를 내고 6월 말 시행업체를 선정, 9월까지 공사를 마칠 예정이던 정부의 VoIP 도입 계획이 늦춰질 수 밖에 없게 됐다. 한국정보사회진흥원 관계자는 "국내 기술과 업계 발전을 위해서는 아리아 도입이 필수적이지만 미국의 반대가 너무 심하다"며 "미국과의 통상 협상이 끝나야 VoIP 도입 일정을 진행할 수 있어 언제 시행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연진 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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