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들어 연등길 따라 푸른빛 숲길 계단을 오르니 산사의 풍광이 서늘하다. 경허, 만공 스님의 선맥이 청정한 충남 예산 수덕사는 23일 신록의 산향(山香)으로 가득했다.
불기 2553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이 달 초 불교 조계종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으로 추천된 설정(雪靖ㆍ67) 큰스님에게 법문을 구했다. 경제위기로 찌들고 남루해진 속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제도의 법문인 셈이었다.
"생활 주변엔 행과 불행이 늘 맞물려 옵니다. 조금 잘되면 오만해지고, 못 된다고 좌절하면 안 됩니다. 진정한 용기를 갖고 최선을 다해 앞날을 준비하면 기회가 옵니다."
번뇌를 끌고 가되, 번뇌를 벗어나 사는 길. 일상 속 언제 어디서나 분별과 망상 없는 평상심을 구하는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의 화두. 생활과 선을 따로 보지 않는 '노선(勞禪) 일치'의 가풍을 통해 스님은 '있는 자리'에서 행복을 일구는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설정 스님은 근세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 스님의 선맥을 계승한 혜암, 벽초, 원담 스님에 이은 수덕사의 4대 방장이다. 평생 선농겸수(禪農兼修)를 실천한 벽초, 원담 스님의 가풍을 이어 지금도 손수 농사를 짓고 있다.
스님은 "농사가 괴롭다고 생각하면 못한다. 일도 마찬가지다. 어렵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일하려고 하면 문제없다. 쉽게 살려니 문제다. 행복은 용기와 피와 땀과 열정을 쏟아야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우리 사회에 닥친 가장 큰 문제로 믿음의 상실을 꼽았다. "최근 전직 대통령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대중들이 정치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믿고 따를 것인지 걱정했다"며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람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직분을 다하기를 바란다"는 당부였다.
조계종 총림의 방장은 선, 교, 율을 겸비한 승랍 40년 이상의 스님에게만 자격이 있는 총림의 최고 어른이다. 올해로 출가 53년을 맞는 설정 스님은 조계종단의 원로로서 오는 10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있는 종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스님은 "승가의 원형이 많이 훼손된 것 같아 안타깝다"며 "스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정견과 확고한 신심, 중생 제도에 대한 굳은 원력,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해 살겠다는 공심을 잃지 말야야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따라서 종단에서 일하는 스님은 이 같은 승격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앙종회 추대를 거쳐 방장으로 취임하는 스님은 "수덕사는 근대 선의 중흥기를 일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라며 "위대한 선사들의 사상과 정신을 이어 불가 사부대중은 물론, 국민들의 행복과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큰 부담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삶의 지표에 대해 물었다. 1998년 췌장암으로 주저앉는 듯했으나 오히려 더욱 정진해 기적적으로 암을 극복한 스님은 "그 때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절대 쉽고 편안하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며 "전력을 다해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속인과 스님을 아우르는 법문으로 '본자천연무조작(本自天然無造作) 하유향외별구현(何有向外別求玄)'(본래는 조작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찌 바깥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는가)라는 나옹 화상의 글귀를 소개했다. 따로 부산스레 진리를 구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 평상심을 찾는 게 도라는 얘기일 터였다.
수덕사=장인철 기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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