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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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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

입력
2009.04.2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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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 여행지에서 화집을 사왔다. 사고 싶은 화집이 많았으나 짐이 많아서 단 한 권만 사기로 마음먹은 터라, 고르고 고르다가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모아 놓은 화집을 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물론 지금도 종종 바깥에서 번잡한 일에 휘말리고 돌아오면 그 화집을 본다.

에곤 실레는 10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텅 빈 공간 안에 놓인 실레의 육체는 불안정해 보이고, 동작이나 움직임은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이는 동요나 격정, 부질없는 욕망이나 불안 따위들이 그저 지나가는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화상 속에 나타난 실레의 잘려진 신체 일부나 토르소는 그가 자연적인 육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 떠오르는 영상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나 자신의 전신을 바라볼 때면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도 알아내야 합니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어느 정도까지 나 자신을 확장 시킬 수 있는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 나 자신이 어떤 신비로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지, 얼마나 더 큰 부분을 보아야 하는지, 지금까지 나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아 왔는지,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쓴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자화상이란 자아를 이해하고 탐색하는 작업이다. 단지 외면을 관찰하는 일이 아니라 내면에 대한 철저한 관찰의 기록이다. 자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만나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과정일 것이다.

독일의 조각가인 막스 클링거는 "자아를 탐색하는 것은 항상 자아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탐색을 주도하는 주체가 곧 탐색의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는데,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의 일부인 탓이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의 얼굴은 역동적이기 때문에 생각에 따라 표정이 변하고, 눈썹이 떨리기도 하고, 피부 결이 미세하게 달라지기도 하며, 시시각각 입 모양이 변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런 역동성 속에서 고요하게 정지하는 한 순간을 만날 수가 있다. 그 순간,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는 어떤 대상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필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다른 사람의 얼굴은 실례를 무릅쓰고 잘도 바라보면서, 정작 나 자신의 얼굴은 오랫동안 들여다볼 수가 없다. 부쩍 는 주름이나 나빠진 피부 결, 웃음 없는 얼굴 때문이 아니다. 그것들 뒤로 떠오르는 나의 정적인 순간과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그렇다. 그 순간, 나는 관조하는 척하며 변명을 만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쉽게 체념하고 받아들이라고 채근한다. 자꾸 스스로에게 기만 당하니 점점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내키지 않게 된다.

그렇더라도 어수선하게 이 봄을 지내고 있는 나를, 자화상을 그리듯 작정하고 오랫동안 바라보아야겠다. 어느 순간 고요가 찾아와 스스로에게 정직해 지거든, 그 때의 내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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