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줄을 선다. 지하 소극장에서 펼쳐질 연극은 그 기다림을 보상하고 남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꿈을 꾸고 난 사람들은 카페에서 담소한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연극이란 이름 하의 완벽한 생산ㆍ소비 구조다. 소극장 산울림의 시간은 예술이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 온 세월이었다.
극단 산울림 대표 임영웅(73)씨는 연극에 관한 한, 삼엄할 정도다. 자신과 관련된 연극적 사건이라면 그는 수치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극사실주의자다. 사방이 예술 관련 서적으로 꽉꽉 채워진 그의 방은 창단 40주년을 맞는 극단 산울림의 사령탑이라기보다 연극학도의 연구실 풍경에 가깝다.
- 명동예술극장 개관이 연극계의 화제다.
"9월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공연에서 연출을 맡게 돼 있다. 1976년 산울림 소극장, 서울시민회관 별관 등지에서 연출했던 작품이다."
- 서재의 상당 부분은 일본 책인데.
"'문예춘추' '떼아트르' '희극비극' '시나리오' 등 주요 연극 잡지들을 정보 차원에서 본다. 지난 군사정권 때는 그것들이 중요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일제 치하여서 자연스레 일어 세대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일본의 시사문예지를 읽게 됐다. 그러나 내 예술에서 일본의 영향이란 전무하다."
- 그렇다면 본인의 예술적 계보는.
"유치진, 이해랑, 차범석으로 이어지는 축이다. 이해랑 선생 아래서 조연출을 오래 했다. 명동예술극장 오픈 공연에서 사실주의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예정이다. 연출의 스승인 김규대 선생으로부터 연극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체득했다."
- 리얼리즘 미학론 같다. 그러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도 있듯, 당신의 연출 스펙트럼을 사실주의로 묶어 둘 수는 없는데.
"나는 연극에서 '~주의'라는 식의 분류법을 싫어한다. 연출가는 작품에 적합한 양식을 취할 뿐이다."
- 2007년 국립극장에서 연출한 '산불'은 우리 시대에 사실주의의 진수를 보인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나는 그렇게 규정한 적 없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사실주의란) 매스컴과 평론가들이 필요에 따라 붙인 결과다."
- 1985년 3월 산울림 극장 개관은 한국 연극사의 사건이었다. 이 땅에서 연극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적 문제로 극장 갖는다는 생각을 선뜻 할 수 없었던 당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연극을 이해하고 고비마다 실질적으로 후원한 아내(오증자 전 서울여대 불문과 교수) 덕이다. 그 힘이 없었다면 1960~70년대의 경제 드라이브 군사정권 아래서 연극하기 힘들었던 시기를 버텨내지 못 했을 것이다.
연극으로 생활 안 돼 방송 PD 일도 했다. 이걸(연극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회의를 붙들고 싸움하던 시절,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다. 1982년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쥐라기 사람들'로 연출상을 탔는데, 부상으로 두 달 해외연수의 기회를 얻었다.
파리, 런던, 뉴욕, 도쿄를 순회하고는 순수 연극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힘들다, 연극을 한다는 건 고행이라는 현실을 확인한 것이다.
나이 60까지 (연극을 하겠다는 계획을) 잡고, 앞으로 10년은 연극에 전력 투구한다는 생각으로 극장 건립을 추진했는데, 여기까지 왔다. 애초부터 내가 중심이 돼 소극장으로 설계했다. 소극장이란 국내 최초의 일이었다.
은행 대출 등 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하고 보니 힘이 떨어져 개관을 늦출까 하고도 생각했다. 부부가 중심이 돼 그 일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장명수 한국일보 문화부장 등을 중심으로 언론ㆍ문화계에서 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 힘으로 조명 등 실내 시설까지 완성돼 1985년 3월 문 연 것이다."
- '산울림'이란 우리 연극의 어느 수준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포된 '산울림표 연극'이란 말은 미학적 분류법이기도 하지 않은가.
"보는 사람의 몫이다. 결과적으로는 당초 우리가 지향하던 바를 종합적으로 표현한 말이 됐지만. 창단 때는 거창한 슬로건은 없었다. 다만 '좋은 연극을 열심히 만들겠다'고만 다짐했을 뿐. 굳이 규정하자면 '완성도 높은 연극'이다. 원칙을 지키고 철저히 연습하며 앙상블을 중시하는 작품 말이다."
- 혹독한 리딩(대본 읽기) 연습 등 여름이면 땀띠가 날 정도의 준비 작업도 유명하다.
"우리의 극을 보고 소생의 힘과 희망을 확인하길 바랬다. 그 활력이 가족, 이웃으로 번져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힘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이 내가 연극을 하는 목적이다. 사람들이 '오늘 연극 보길 잘 했다, 다음에 또 연극 보러 가야지' 하?마음이 들게 하는 연극을 만들자는 다짐이었다."
- 산울림은 스타의 산실이기도 한데.
"결과론이다. 손숙 김용림 윤여정 윤소정 사미자 최선자 등 여배우들, 김무생 함현진 김성옥 김인태 등 남자 배우들은 모두 적어도 TV의 톱스타였다. 그들이 우리 극장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고 상을 타니, 그 역시 결과적으로 매스컴이 만든 말이다."
- 대관하지 않는 것은 원칙인가.
"소극장 초창기에는 대관도 좀 했다. 그러나 타 극단에서 하는 연극은 그 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점을 해결할 길이 없잖은가. 그런 걸 보고도 관객에게 결국 남는 것은 산울림 극장에서 봤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일이 축적되면 결국 산울림의 이미지로 굳어진다는 판단이었다. 개관 2년 뒤부터는 모든 걸 자체 기획으로 메웠다.
코앞의 경영도 힘든데, 그런 식으로 버텨낸 것이다. 임영웅이 모든 걸 책임지는, 일종의 프로듀서 시스템인 셈이다. 요즘 연극 제작 방식인 기획 시스템이 돈 벌기 위한 것이라면, 프로듀서 시스템의 목적은 좋은 작품이다."
- 경제난은 어떻게 버텼나.
"IMF 시절, 극장 깨자는 말도 있었다. 2~3년 지나면 자리 잡을 거라고 한 초창기에도 나는 10년은 버텨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년을 지나 봐도 달라진 거라곤 없어 내가 '극장 폭파 운운'이라고 했다며 어느 신문이 1997년 연말 연극계 결산 기사에 썼던 적이 있다.
내 의도는 후배들이라도 소극장 제대로 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자는 의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경솔했다. 어리석었다. 이제 산울림이란 공간은 나의 것이 아닌, 공공의 것이 돼 버렸다고 생각한다."
- 그 공공성의 예를 든다면.
"2000년 박근형 등 젊은 연출가들을 초청해 열었던 연극제(3기)에 리스크를 감수하고 제작비를 다 지원했는데, 과연 적자가 났다. 심재찬, 채윤일, 채승훈이 1기였다면 3년 전 김광보, 이성열 등은 2기다.
작품은 물론 캐스팅도 전적인 권한을 줬다. 그 동안 우리 극장에 안 섰던 배우들의 출연을 격려했다. 산울림이 보수적이라는 인식을 깨고 미래지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 문화예술위가 소극장 지원책을 펴오고 있지 않나.
"2007년부터 1억원, 경기가 나빠진 올해부터는 6,000만원씩을 지원한다. 그런데 제대로 하자면 두 편도 못 하는 액수다. 소극장 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오다 보니 어느덧 24년이다. 오래 버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래도 산울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여성 연극'은 효율적 벤치마킹이었다.
"한국 연극의 주 관객층은 여대생이다. 학교를 뜨게 되면 연극으로부터 멀어지는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자는 생각이었다. 우리 부부, 연극평론가 구히서, 장명수씨 등이 구수회의를 열었다.
오 교수가 1975년 정우사의 첫 출판물로 번역한 '위기의 여자'가 떠올랐다. 마침 이화여대 개교 100주년이란 데 착안, 과거 연극 팬들인 여대생들의 관심을 당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페미니즘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던 시절, 그 같은 선택은 예언적이기까지 했다.
"1986년 4월 1일 공연을 시작했는데, 개막 첫날부터 중년 관객들이 몰렸다. 7개월 동안 5만명이 들었다. 이혼 이야기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당시 사회 풍토에서 대단한 기록이었다. 동아방송 성우 담당 PD 시절, 인연이 닿았던 박정자가 관심을 보였는데, 거절했다.
그는 노파 역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평범한 가정주부의 일이라면 더 공감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애초 김민자ㆍ전무송 커플로 하려던 게 박정자ㆍ조명남으로 바뀐 이유다.
'39도의 정열로 하지 말고 20도의 인간으로 연기해 달라, 죽은 듯이 역할 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런데 관객이 몰려왔던 것이다. '엄마는 50에 바다를 발견했다' '담배 파우는 여자' '숲속의 방'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으로 이어졌다.
곧 이어 TV 등에서는 엄마, 아내를 주제로 내세운 프로가 속속 등장해 외도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우스운 것은 그 흐름이 우리 여성 연극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처럼 이야기되던 일이다."
- 향후 산울림 운영 계획은.
"내가 안 해 본 것은 다 관심 있다. 그러나 주축은 40주년 기념 레퍼토리 작품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여성 연극들이 먼저다. 또 가난과 편견에 맞서 싸운 예술가 상을 그린 '테오와 고호'도 올려, 연극이 가벼워진 현실을 돌아보고도 싶다."
-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요약한다면.
"두 축이 있다. 8ㆍ15, 6ㆍ25, 피난, 환도, 4ㆍ19, 5ㆍ16, 광주, 민주화 등 세계사에서 드문 시련의 시간을 가장 가까이 겪은 세대로서의 시간, 연출 겸 소극장 경영이라는 연극인으로서의 삶이다. 아직 나눌 일이 더 있다고 믿는다."
● 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웅씨는 극단 산울림의 최장수 레퍼토리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가리켜 "여성 연극에 대한 대항마"라고 했다. 산울림의 창단을 알리기도 한 이 작품의 공연사는 우리 연극의 대중성 아래 감춰진 또 다른 정신사이기도 하다.
1969년 10월 3일 당시 서울 종로구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 내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국내외를 합쳐 1,270여 차례나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는 명연기의 산실이었다. 함현진 주호성 안석환 송영창 박용수 박상종(에스트라공 역), 김성옥 전무송 정동환 이호성 한명구(블라디미르 역) 등은 명배우의 대명사가 됐다.
초연 당시에는 '부조리극'이란 말부터 생소했다. 임씨는 무의미한 대사와 대화를 새로운 희극의 텍스트로 보고 그에 따른 연출을 했고, 고 유치진 등의 호평은 그 선택의 정당성을 증명했다.
이 극을 산울림의 본격적인 고정 레퍼토리로 삼은 것은 소극장 개관이 결정적 계기였다. 기본적 무대장치로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되는, 기동성 있는 무대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초청받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국가적 대표성을 띠게 됐다. '부조리 연극'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비평가 마틴 에슬린이 출국 일정을 늦춰 가며 이 작품을 관람하고, A4 용지 5장에 달하는 리뷰를 남겼다. "산울림의 고도는 옳았다"는 것이었다. 이 거물의 평은 해외 공연의 신호탄이었다.
1989년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무대는 이듬해 더블린 페스티벌 초청으로 이어졌다. 원작자 새뮤얼 베케트의 고향 더블린은 한국적 해학의 '고도'에 역시 기대 이상의 상찬으로 답했다.
임씨는 "앞으로 1~2년에 한 번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겠다"며 부단한 버전업의 욕구를 드러냈다. "'고도'는 묘해요. 결함이없거든요." 할 때마다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원로 연극인의 표현이다.
그는 "연습에 임해 작품을 펼치면 늘 새로운 작품을 보는 듯 신선감이 밀려 온다"며 "지난번에 발견 못했던 게 더 생긴다"고 말했다. 그에게 이 작품은 무한히 열려 있는, 연극의 법열이다.
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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