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앞둔 사랑하는 남자에게조차 아침엔 강화도에 있다 속이고, 점심 때엔 울릉도라고 사기를 쳐야 한다. 그렇다고 어수룩한 남자들 등치며 살아가는 꽃뱀도 아니다. '안정성과 안락성에 있어선 남부럽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는 7급 공무원. 그러나 공무원도 공무원 나름이다.
영화 '7급 공무원'에서 김하늘의 몸을 빌린 수지는 한때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구호 아래, 지금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훈(院訓) 아래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국가정보원 요원이다.
위장과 미행과 투입과 철수라는 땀 냄새 진한 단어들로 수식되는 역할. 인기 TV드라마 '온에어'에서 '막장 싸가지'라 불릴 정도로 도도함이 하늘을 찌르던 톱스타 오승아 역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았던 김하늘의 행보치곤 참 의외다.
김하늘은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출연하기까진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액션 연기는 처음인데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설렘이 있었고, 내가 이걸 어떤 식으로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궁금증도 발동했다"고 말했다.
"가진 게 많으면 용기 정도는 없어도 돼", "몸매는 화면에 나와도 영혼은 화면에 안 나온다"고 외치던 오승아와는 사뭇 다른 모습. "출연 결심을 하는 순간 '난 앞으로 죽었구나' 생각했어요."
그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을 비켜가지 않았다. 말을 타고 달리다 나무에 부딪쳐 무릎이 거의 으스러질 정도로 다쳤고 한 달 가량 깁스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달 동안은 승마와 제트스키, 펜싱 등 거친 운동에 친숙해져야만 했다. "멍을 달고 다녔어요. 물리치료다 뭐다 수시로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영화 속 수지는 소주와 콜라, 와인 등을 믹서기에 돌려 제조한 별난 폭탄주로 사랑의 생채기와 격무에 따른 스트레스를 홀로 달랜다. 그러나 김하늘은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목욕물에 청주를 풀어 몸을 다독였다. 그렇게 멜로와 코미디에 굳은 몸을 몰아붙여 완성한 동작은 매끄러운 액션으로 이어졌다.
"무술감독님이 '미녀 삼총사'와 '킬빌', '툼 레이더' 등 여자배우가 주연인 액션영화를 보라 하셨어요. '아! 몸매 예쁘다'는 생각만 들게 했지 별 도움은 안 주더군요. 제가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는 한 듯해요. 그렇지 않나요?"
웃음으로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7급 공무원'의 촬영 현장도 폭소 만발이었다. 김하늘은 재준(강지환)과 수지가 서로에 대한 사랑의 배신감과 임무수행 사이에서 극단의 감정을 작렬시키는 일명 '랍스터 신'을 웃음의 백미로 꼽았다.
"랍스터를 같이 먹는 장면에서 감정이 폭발해 둘이 나무망치로 접시까지 깨뜨리는 장면이에요. 과격하게 연기하다 망치가 날아가기도 해 다들 배꼽 빠질 것처럼 웃어서 NG가 많이 났죠. 접시 파편이 튀어서 손에 피가 나기도 했지만 '어 또 다쳤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강지환과는 광고 촬영과 TV드라마 '90일, 사랑할 시간' 이후 공식적으로 세 번째 만남. 2006년 멜로 영화에 함께 캐스팅됐다가 촬영이 무산됐던 불운까지 포함하면 네 번째 인연이다. "드라마는 시청률 바닥을 기었고, 영화는 엎어졌던 사람과 또 연기하려니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도 있더군요. 저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그 전엔 안 됐으니 이번엔 잘 되지 않을까'라고요."
김하늘은 '7급 공무원'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도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관객들의 기대치를 낮출 수 있으니 유리할 수 있다"는 것. "럭키 세븐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 밖에 없는 7가지 이유', 이런 의미부여도 가능하고요. 7가지 이유로는 김하늘의 열 번째 영화 출연, 김하늘의 열연, 김하늘의 맹활약 등등 어때요. 하하."
■ 리뷰/ 영화 '7급 공무원'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거리낌없이 웃었다. 지저분하고 불편한 웃음에 몰두하는 조폭 코미디의 민망함도 없고, 오로지 달콤한 웃음을 위해 영화적 완성도를 희생시키는 로맨틱 코미디의 무모함도 보이지 않는다.
'7급 공무원'은 '과속스캔들'과 더불어 조폭 코미디의 소멸과 로맨틱 코미디의 지지부진으로 방향을 잃은 충무로 코미디에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는 영화다. 제목은 '7급 공무원'이지만 재미는 가히 '고위 공무원' 급이다.
첩보세계를 소재로 택한 이 영화의 배경은 묵직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경쾌하다. 국내 핵심기술을 빼돌리려는 러시아 스파이들을 뒤쫓는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활약상이 영화의 바닥을 든든히 다지고, 서로의 실제 직업을 모르는 국정원 요원 수지(김하늘)와 재준(강지환)의 엎치락뒤치락 사랑이 화면을 돋을새김한다.
첩보영화를 접목시킨 일종의 변형 로맨틱 코미디인 셈. 킬러 부부의 목숨 건 사랑싸움을 그린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의 자장이 느껴지지만, 맛깔스러운 대사를 앞세운 웃음에 있어선 분명 독창적이다.
'매너 좋은 남자들은 90%가 선수이고 나머지는 장남' '남녀가 같이 느낄 수 있는 공감대는 성감대밖에 없다' '유산이 많으면 장남이 최고' 등 능청스러운 대사에서 웃음을 참기 쉽지 않다.
의식적으로 망가지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게 하는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눈길을 잡는다. 액션에 몸을 던진 김하늘은 외모만이 그의 존재가치가 아님을 증명하고, 일기당천의 기개를 뿜어내다 엄마의 전화 한 통에 몸을 바싹 오그리는 강지환의 코믹 연기는 그의 다음 행보를 주목케 한다.
특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폭소를 터트리게 만드는 홍 팀장 역의 장영남, 해외공작파트 팀장 원석 역의 류승룡은 좋은 조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입증한다.
밀도가 떨어지는 이야기와 2% 부족한 액션이 아쉽다면 아쉽다. 그러나 코미디가 웃겨준다면 맡은 바 사명은 다한 것 아닌가. 스릴러 '검은 집'의 신태라 감독. 23일 개봉, 12세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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