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 실상사의 타종소리에 맞춰 귀농학교 숙소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간단히 세수를 마친 학생들이 강당에 모였다. 5시부터 30분간은 명상 시간이다. 사방은 다시 어둠과 고요에 묻혔다. 아직 하늘엔 별이 총총한데 산 아래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가 곧 날이 밝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5시 30분 본격적인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30분을 걸어 실습농장에 도착한 교육생들은 곧바로 삽을 챙겨 아직 서리가 남아있는 논으로 들어선다. 논둑을 깎고 다지는 작업이다. "아이고 허리야!"라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이어진다.
8시경 아침 식사를 한 후에는 바로 산밭으로 향했다. 약용 채소를 심을 밭에 골과 망을 짓는 작업이다. 비뚤비뚤 휘어지고 간격도 고르지 않다. 결국 모내기 줄을 가져와 골을 맞췄다. 초보 농군들에겐 어느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실상사에서 점심 공양을 한 후 오후에는 채소밭에 물을 주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마른 땅이 촉촉하게 적셔지는 것 만큼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새참으로 막걸리가 나왔다. 안주는 원추리 데침이다. 꿀맛이다. 마지막 작업은 양파 밭에 유기농 비료 뿌리기이다. '적당히'가 얼마만큼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손놀림 하나하나가 서툴기만 하다.
변강훈 교육팀장은 그러나 다그치지 않는다. 농작물이 자라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를 기다린다. "농사기술보다는 몸과 마음을 적응시키는데 우선을 두고 있다"는 게 실상사 귀농학교의 특징이다.
기상과 취침시간을 자연의 시간, 농부의 시간에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귀농 4년차인 안문재(54)씨는 '어울림의 순리'를 강조했다. 물과 흙 등 자연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이웃과의 어울림이 중요하다. 요즘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대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동네 주민들과의 소통의 시작이다.
젊은 층의 적극적 선택이 대다수였던 것에 비하면 작년부터는 불경기로 인한 탈출구로 귀농학교를 찾는 이들이 늘었다. 대구에서 치킨센터를 하던 '봄봄'(59, 이곳에선 모두 이름대신 스스로 지은 별명을 부른다.)씨는 작년부터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던 가게를 접었다.
IMF 때 직장을 나와 10여년간 꾸려온 생업이었다. 전산직에 근무하던 '살구'(49)씨는 구조조정으로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퇴직은 본의가 아니었지만 새로운 인생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잡혀있지 않지만 귀농학교가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오후 5시30분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교양강좌가 끝난 9시 30분에는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100배를 올린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과 이웃, 세상 모든 생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밤 10시 하나 둘씩 숙소의 불이 꺼진다. 어둠이 익숙해지자 높고 낮은 지리산 줄기가 점점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굽이굽이 능선을 넘듯이 먼 길을 돌아 농부가 되는 꿈을 꾼다.
남원=최흥수 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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