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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유연함이 이기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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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유연함이 이기는 시대

입력
2009.04.2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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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과정이나 서부개척의 과정을 보면 미국은 개척자적 정신을 주요 가치로 보는 듯하다. 시행착오에 관대한 미국의 문화를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자동차 회사 GM의 파산신청 논의나 개인파산이 용이한 미국 법률 시스템에서도 시행착오에 대한 관대함이 엿보인다.

흔히 기업가정신으로 부르는 것도 다분히 미국적인데, 이러한 미국적 가치를 대변하는 곳 중 하나가 미 서부의 실리콘 밸리이다. 이곳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는 새로운 개념들이 시험되고 20대 백만장자가 속출하던 시절이다. 당시 필자가 잠시 거주하던 인근 버클리 대학의 경우, 학부생들은 학과 구분 없이 입학해서 3학년에 진급할 때 전공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사이에서 진입 희망학과 1위이던 전산과 다음으로 수학과가 2위의 인기를 구가하곤 했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졸업 후에 취업하고자 했던 실리콘 밸리 기업들의 영향이 컸다. 이 회사들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수학과 졸업생들이 인기가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교육하는 어떤 것보다 앞선 새로운 시도를 하던 기업들은 수학적 사고의 유연성으로 무장한 이들 졸업생이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이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특정 사회에서 선호되는 직업을 보면 그 사회의 철학과 정신이 보인다. 미국적 가치를 좋은 것으로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미래지향적인 유연한 사고를 교육의 중심에 두는 것은 한국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정보통신 등의 분야에서 놀라운 성장을 해온 데다, 이제는 세계 최고인 분야도 여럿 가지게 되었다. 양적 성장의 단계에서 질적 성장의 단계로 옮겨가는 초입이고, 이제는 질적 성장의 동력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응용과학과 맞춤교육이 양적 성장을 주도했다면, 기초과학과 유연한 교육이 질적 성장의 틀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국내 일간지에서 로저 콘버그 교수의 인터뷰기사를 보았다. 2006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그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이면서 건국대 석학교수이기도 하다. 의학 분야에 대한 응용 등에도 식견이 많은 그가 의외의 소리를 했다. "실용적인 가치에만 목표를 두는 연구가 아닌, 새로운 지식 탐구를 위한 기초연구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한 술 더 떠서, "이윤 추구를 일차적 목표로 하는 회사처럼 응용과학에만 매달려서는 노벨상에 이르는 길이 멀어진다"고까지 한다.

콘버그 교수의 조언은 한국 정부의 연구비 정책과 대조된다. 융합을 강조하며 순수기초과학에는 거리를 두는 정책적 방향에 대한 매서운 경고이며, 국가와 기업의 연구비 집행 우선순위가 달라야 한다는 고언이다. "실패한 노력도 이후 연구에서는 중요한 자양분"이라는 대목은 미국 식 시행착오에 대한 관대함이지만, 최근 강조되고 있는 연구비 사후평가 등과 관련해서 생각할 측면도 있다. 실패한 연구를 무조건 부조리한 것으로 몰아치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생긴 연구역량의 강화까지 고려하는 다면평가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세계적 수준의 대학 육성을 위한 WCU(World Class University) 지원이 시작되었다. 국가 차원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순수기초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하는 연구소도 육성해야 한다. 이젠 우리나라도 연구와 교육 모두에서 유연함으로 승부해야 할 때다.

박형주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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