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봄꽃이 피는 순간도 갑자기 오지만 봄꽃이 지는 순간도 갑자기 한꺼번에 온다. 봄꽃을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봄꽃이 피어있는 순간은 너무나 짧다. 일년의 사계에는 많은 축제가 있지만 나는 봄꽃놀이 축제를 제일로 사랑한다. 그 축제를 즐기는 것도 너무나 좋지만 그 축제 뒤의 쓸쓸함이 어떤 때는 더 좋다.
김영랑의 이 시는 봄이 깊어지는 계절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읊어보았을 시이다. 모란이 피었을 때보다 지는 것을 보는 순간 더더욱 생각나는 시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순간, 우리는 깊은 즐거움의 순간이 비애의 순간으로, 그 비애를 자각하는 인간이 일상의 꽃을 불멸하는 미학의 꽃으로 순화시키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미 고전이 된 많은 시들은 우리에게 시인이었던 일생의 어느 순간을 상기하게 한다. 모란이 지는 날,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며 어느 꽃그늘 아래에서 울었던 기억, 당신은 없는가?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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