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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6> 보석 같은 한국영화-최후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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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66> 보석 같은 한국영화-최후의 증인

입력
2009.04.2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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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초, 김성종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최후의 증인> 의 주인공 '오병호 형사' 역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다.

시나리오와 배역이 대단히 마음에 들어 긴 제작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출연을 결정했다. 이두용 감독과는 첫 작업이었다. 나는 그가 전작 <초분> , <경찰관> 에서 보여준 탁월한 연출력에 매료되어 있었다. 또한 정일성 촬영감독과는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 한 사이였다.

당시에는 제작여건이 열악하여 배우가 의상과 소품을 준비할 때였다. 나는 '오병호 형사'를 만들기 위해 동대문, 남대문 시장으로 나섰다. 헌 옷집을 뒤져서 '오형사'의 코트와 옷들을 구했다. 헌 구둣방과 가방 가게를 뒤졌다. 그리고 그것들을 돌바닥에 갈아서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감독과 촬영감독이 촬영지를 답사하는데 같이 가자며 나섰다.

두 사람 눈이 동그래졌다. 촬영지 헌팅에 배우가 합류한다는 건 '괴이한' 일에 가까웠다. 더욱이 차 트렁크에 '오형사'의 의상과 소품까지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자 촬영감독이 흥분해서 카메라를 차에 실었다. 운전기사 대신 촬영조수가 운전대를 잡았다. 촬영지를 발견하면 즉각 촬영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강원도에서 전라도 땅 끝까지 전국일주 헌팅이 시작됐다. 잔설이 깔린 황태덕장이 나타났다. 황금빛의 여명과 은빛의 잔설이 교합된 덕장을 배경으로 사건을 쫓는 오형사를 향해 카메라가 돌아갔다. 뒤축이 다 나간 구두를 벗어들고 꽁꽁 얼은 얼굴을 녹이며 전라도 산골을 헤매는 장면도 포착됐다. 한국의 기막힌 자연과 빛을 주인공과 함께 잡아갔다.

헌팅 중에 주인공 '오형사'의 추적 장면으로 이미 1만 피트가 넘는 필름이 돌아갔다. 제작자 김화식 사장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 한 편에 사용할 필름의 3분의 1을 헌팅에서 이미 쓰고 만 것이다.

그러나 김사장은 우리의 적극적인 자세에 더 힘을 실어줬다. 캐스팅도 한국 최고의 스타인 정윤희와 한혜숙, 최고의 연기자 최불암, 이대근, 최성호 등 감독이 원하는 배우를 모두 기용하도록 하였다.

카메라에 4계절을 담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시간적 배경 또한 6ㆍ25전쟁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위험한 전쟁장면과 격투장면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다. 흉측한 윤간장면도 있었다.

정윤희는 처음 해보는 연기에 매우 당혹해 했지만 순발력 있게 잘 해냈다. 정윤희를 사랑하는 최불암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이대근은 정윤희의 남편 역을 맡은 게 신이 났는지 촬영현장에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최불암과 이대근은 영화계에서도 친형제 같은 소문난 사이였다.

그러나 연기에 한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한국 최고의 미모인 정윤희를 가운데 두고 벌이는 연기 대결이니 눈에 불꽃이 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덕에 정윤희의 연기가 더욱 돋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타고난 자신의 미모에 기대지 않았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수난의 한국 여인상을 100% 소화시켰다. 한혜숙도 정윤희에 못지않았다. 오형사를 사랑하는 풍금 치는 여선생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그녀는 <꿈나무> 에서 나와 공연한 경험이 있었는데 깜찍한 연기로 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텝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는 굴절의 한국사를 추적하는 '오병호 형사' 역을 연기하며 스스로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촬영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100%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한 여인의 비극을 좇는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진실들과 만나게 되었다. 사창가에서는 창녀들과, 판자촌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교도소에서는 죄수들과 만났다. 창녀들에게는 뼈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그들대로의 희망과 따뜻한 사랑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운의 상처가 있었지만 훈훈한 사랑이 넘쳐 있었다. 교도소 촬영 때는 가슴이 아파 식사를 거른 적도 있었다. 전국 교도소를 모두 돌며 수많은 죄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교도소 밖에 있는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죄수, 간수를 분간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우리의 역사 속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 되어 며칠 동안 구역질을 하며 앓아 눕기도 하였다. 나는 그렇게 '오병호 형사'가 돼가고 있었다. 영화촬영을 마치고 나는 오래 앓았다. 반신이 마비가 되었다. 추운 겨울 촬영을 위해 전국을 헤매 다닌 몸이 동상에 걸린 것이었다.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시간이 지나며 몸은 치료가 되는 듯했으나 '오형사로서의 마음'의 치료는 되지 않았다. 퇴원 후 차차 배우 직업을 접을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오병호 형사처럼 내 자신한테 총을 쏘지 않으려면 말이다.

나는 실로 <최후의 증인> 의 '오형사'에 빠져 내가 오형瑛适?오형사가 나인지 구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화가 완성되고 극장에 걸렸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에 대하여 누구도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극장에서 1주일 만에 간판이 내려지고 영화제에서도 '팽' 당했다. 제작자는 수많은 돈을 날렸다.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허망했다.

그리고 30년 세월이 지났다. 어느 날 갑자기 <최후의 증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젊은 영화감독들이 "보석 같은 한국영화"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영상자료원에서, 영화제에서 <최후의 증인> 의 재상영이 시작됐다.

죽은 영화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즘 대학로에 자주 간다. 나의 신작 <주문진> 의 캐스팅을 위해서다. 그곳에서 나는 신선함과 변하지 않는 열정을 만나곤 한다.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10년 전 한국 영화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종의 세대교체였는데 감독과 배우의 물갈이였다. 그 나물에 그 밥, 그 연출에 그 얼굴을 대중이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 변화는 이제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워낭소리> , <똥파리> 에 열광할 정도로 대중은 성숙해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에 세계인이 보내는 환호와 흡사하다.

거기에는 스타도 없고 돈도 없다. 의욕과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30년 전 쓰레기라고 버렸던 "보석같은 한국영화" - <최후의 증인> 을 다시 봐야겠다.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발견된 그 보석의 광채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겠다. 이번 전주 국제영화제(4월 30일~5월8일)에서 '특별회고전-최후의 증인'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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