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영(24ㆍ지체장애 1급)씨는 '골형성부전증'을 앓고 있다. 뼈가 너무 물러 기침만 해도 부러지는 선천성 질환이다. 1년 내내 깁스를 한 채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낸 적도 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외출은커녕 밥 한끼 챙겨 먹기도 힘들었다. 그런 그가 전남 순천의 집을 떠나 낯선 서울에서 당당히 '홀로 서기'에 도전하고 있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구 문정시영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자 전동휠체어를 탄 박씨가 반갑게 맞았다. 이 아파트는 1988년 올림픽 당시 장애인선수촌으로 사용됐는데, 서울장애인자립센터에서 1층에 전세를 얻어 박씨 같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체험시설로 쓰고 있다.
가족의 도움이나 시설에 의지해 살아온 장애인들에게 자립에의 의지와 자신감을 심어주는 공간이다.
82.5㎡ 규모에 방 2개, 거실, 화장실, 부엌이 있는 집 안에는 가구와 가전제품 등 웬만한 살림이 갖춰져 있어 옷가지만 들고 오면 된다. 임대비는 하루 2,000원, 전기와 수도료, 관리비 등을 포함해도 한 달 이용료가 5만원이다. 박씨는 지난달 문을 연 이 체험공간의 세 번째 손님이다.
집 구경을 청하자, 박씨는 안방으로 안내하더니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보세요. 버튼만 누르면 침대 높낮이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요. 침대 머리나 발끝 부분만 높이거나 낮출 수도 있고요. 순천 집에서는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됐던 일들이죠."
천장의 전등도 또 다른 리모컨으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다. 리모컨의 '취침'버튼을 눌러 놓으면 30분 뒤 자동으로 불이 꺼진다. 화장실도 여느 집보다 넓고 모든 문에는 문턱이 없어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인근 소방서에 집 주소와 박씨의 인적사항 등이 등록돼 있어 위급한 상황이 생길 경우 119 버튼만 누르면 구급차가 바로 달려온다. 다행히 지난 보름 동안 다급한 도움을 청할 일은 없었다.
1m가 채 안되는 키, 30kg 남짓한 몸무게. 휠체어에 의지한 가냘픈 몸으로, '독립'을 꿈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립생활 체험을 권한 이는 얼마 전 강의차 순천을 찾았던 서울장애인자립센터 박찬오(40ㆍ지체장애 1급) 소장이다.
지난달 30일부터 3개월간의 자립생활을 시작한 박씨는 "요새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순천의 집은 좁고 계단도 많아 휠체어로 움직이기 불편해요. 외출을 하고 싶어도 부모님 일정에 따를 수밖에 없어 답답했죠. 갇혀 있다 누리는 자유가 좋아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아요."
자립생활 3주째.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중ㆍ고교 과정은 검정고시로 마친 박씨의 생활은 최근 몰라보게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집 근처 도서관 가기, 지하철 타기, 방송통신대 출석 등을 혼자서도 거뜬히 해내고 있다. 또래들과 만나 카페에서 수다도 떨고, 홍대 앞 클럽에 가보기도 했다.
송파구가 2005년부터 전국 최초로 실시하고 있는 '장애인 활동 보조'(한달 최대 80시간) 서비스도 박씨에게는 큰 힘이다. 활동 보조인이 오전에 3시간 가량 들러 청소와 설거지 등 을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웬만한 일은 혼자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용기도 부쩍 늘었다. 다음달부터 인근 장애인체육센터에서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난생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난 터라, 부모님은 늘 제가 밥은 잘 먹는지, 외출했다 뼈가 부러져 주저 앉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으세요." 박씨는 다음달 8일 서울에 오시는 부모님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릴 참이다.
박씨는 요즘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자립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뒤의 삶에 대한 걱정이다. "가끔 '내가 장애인이었나'라고 느낄 정도로,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면 어쩌나, 사실 좀 막막해요."
최근 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집이나 시설에 갇힌 삶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자'는 자립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장애인 복지정책은 여전히 시설을 늘리고 시설에 예산을 지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서울에 강북자립생활센터 등 5군데, 전국을 통틀어도 광주의 우리이웃자립생활센터, 울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 10곳 정도에 불과하다. 송파구의 체험공간은 박씨 이후 5명이 예약한 상태. 한 사람 당 최장 6개월까지 살 수 있어 향후 3년 분이 다 찬 셈이다.
박찬오 소장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체험하고 나서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자활공간을 많이 만들어 장애인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데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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