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전시를 앞두고 전시 마무리 작업에 여념이 없다. 작업실에 앉아 오랜 작업으로 굽은 어깨와 손마디를 펴본다. 여자는 손이 예뻐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내 손을 들여다보니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전공이 한국화이다 보니 대학 때는 손톱에 먹물이 자주 끼었고, 그 모습으로 실기실을 나갔다가는 먹물이 아니라 때가 아니냐는 오해를 종종 사기도 하였다.
한국화 채색물감 분채는 손가락으로 개어 써야 했다. 그러다 보면 손톱엔 총천연색 물을 들이게 되는데, 다른 색은 그럴 듯 하지만 주황색은 마치 김칫국물이 배어 있는 듯 해보여 피하고 싶었던 색이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 미대를 다니며 작업복 차림으로 온 교정과 학교 정문 앞까지 진출해 다니는 일을 폼 나는 일로 생각했지만, 손톱만큼은 슬쩍 뒤로 감추고 싶었던 것 같다.
물감 개고 작업하는 손이다 보니 네일 아트가 유행이라 해도 매니큐어 칠해 본 기억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고, 굵은 마디와 상처가 여기저기 눈에 띤다. 그래도 이 손이 보배가 아닌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을 이제는 떳떳하게 내민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얘기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좋은 직업이 있다면 예술가라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이 침침해지는 노안은 불필요한 것을 보이지 않게 해준다. 인상파의 대가인 모네(Claude Monetㆍ1840~1926)는 말년에 백내장을 앓다 시력을 잃었는데 이것이 독특한 화풍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국 근대 화가 황빈홍(黃賓虹ㆍ1864~1955)이 말년에 밤의 산수를 즐겨 그린 것도 백내장과 관련이 있다. 시력이 최악이 되는 89세에 그의 필의 사용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예술의 정점에 도달한다.
모필을 사용하는 동양의 서화가들이 서양의 화가들보다 장수하는 이유로 호흡기관이 비교적 튼튼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호흡과 용필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문인화의 대가인 오창석(吳昌碩ㆍ1844~1927)이 80세에 그린 그림에도 힘찬 필력을 볼 수 있다. 나이 들어감에 손에 힘이 약해졌겠지만, 붓을 꽉 잡고는 우쭐우쭐하지 않고 망설임이나 주저함도 없이 독특한 필법으로 대가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낫을 갈 때는 양쪽의 날을 모두 잘 갈아야 한다고 한다. 한 쪽은 '재주'라는 날이고 다른 한쪽은 '덕성(德性)'이라는 날이다. 재주라는 날만 잘 갈아 낫을 썼다가는 자기 재주에 자기 손이 다치기도 한다. 재주로는 세상을 못 넘기는 것이다. 재주와 덕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점점 젊은 시절 채웠던 재주를 누르고 덕성을 펴는 일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들어감에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리면 필요 없는 것을 빼고 재주를 죽여 간다. 크게 화낼 것도 없고 느낌이 많이 둔해지며 매사에 가지치기가 쉬워지고 본질과 본질이 만나는 일에만 집중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이 한 곳에 집중되고,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며 통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묵을수록 깊어지는 것이 예술이다.
그러기에 나이 든다는 것은 예술가가 갖는 축복일 터이다. 불혹의 나이에서 이제 학교 다니던 시절 선생님께 배운 것을 떠나보내고 내 몸 속의 변화를 느낀다.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내 손을 들여다보며 수고 많았고 앞으로도 더 부탁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이 손이 부디 재주가 아닌 덕성으로 맑음과 통하길 바라며 세월을 맞이하기로 약속한다.
안진의 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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