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골뱅이 사온 거 어디 있어?" "싱크대 밑에 있어요." "깻잎은?" "냉장고 야채실에 보세요."
당근 오이 대파는 성냥개비만하게 채를 썰어 오징어채와 함께 얼음물에 담가 놓고…, 우선 골뱅이 국물을 절반쯤 넣고, 고춧가루 한 큰 술…, 그 다음에는 설탕 두 큰 술…. <여성시대> 홈페이지에서 프린트한 요리법을 벽에 붙여놓고는 고춧가루 한 술 넣고 쳐다보고, 설탕 두 술 넣고 또 쳐다본다. 그렇게 더듬어 만든 양념장을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을 본다. 여성시대>
새콤 달콤 매콤, 그리고 어금니 사이에서 고소하게 부서지는 깨소금… 오케이! 예상보다 양념장이 맛있어 기분이 좋다. 양념장 그릇은 설탕이 잘 녹도록 테이블 한쪽에 덮어두고, 골뱅이 깡통에서 국물을 말끔히 따라 버린 후 도마 위에 쏟아놓고, 큰 골뱅이는 골라 모양나게 세로로 절반씩 잘라준다. 그렇게 자르라는 설명은 없지만 이런 건 요리사의 기본 아니겠는가.
'다음은 뭐더라? 아차, 야채를 물에서 건져야지.' 얼음물에 담가 놓은 야채를 급히 채로 건져 물기를 뺀 뒤 남은 물기가 빠지도록 채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큰 플라스틱볼에 야채와 골뱅이를 넣고 양념장을 부으며 손으로 살살 버무려 접시에 담아내면 완성이다. 하지만 급하게 서두르면 안 된다. 골뱅이를 버무리는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다른 음식들이 모두 테이블에 나와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만약에 골뱅이를 미리 버무려 놓고 다른 음식들의 완성이 늦어진다면 낭패다.
오늘은 내가 요리사를 자청한 날이다. 손님도 초대되어 있다. 아들과 딸아이의 짝꿍들이 거실에서 주방 쪽으로 촉각을 곤두세운 채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내 요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보~! 청주가 맛술하고 같은 건가? 여기는 청주를 넣으라고 했는데…." 주방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큰소리치며 소파에 앉혀놓았던 아내를 기어코 불러냈다. "요리사 아저씨! 같이 합시다. 짱은 당신이 먹구, 나는 시키는 것만 할께." "그래 줄래?"
아내의 약소(?)한 협조를 받아 겨우 깐풍기까지 만들어진 뒤에야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이게 밖에서 사먹으면 얼마인지 줄 알아?" 내 잘난 체에 다들 고개를 끄떡이며 그저 맛있게 먹어준다. 하긴 거의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내 요리인생(?)은 어느덧 일 년하고도 반년을 넘어서고 있다. 그 동안 칠리소스 새우, 스키야키, 김치 넣은 달걀말이이, 고등어 무 조림, 감자채 볶음 등등, 내가 만든 수많은 요리들이 우리 가족의 밥상에 올려졌다. 하지만 식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역시 첫 번째 작품(?)이었던 골뱅이 무침이다. 지금 내 책꽂이에는 <나만의 요리책> 이 꽂혀있다. 골뱅이 무침 이후부터 요리에 재미를 붙여 틈틈이 <여성시대> 홈페이지에서 복사해 스크랩한 것이 어느새 두꺼운 요리백과가 되어가고 있다. 여성시대> 나만의>
"여보, 이거 아직 많이 남아있어요." 마트에서 쇼핑 카트 속에 숨어있는 굴 소스를 발견하고 아내가 말한다. "응~, 이건 매운 맛이야. 이번 주말에는 이게 필요하다구!" "아니? 이 비싼 골뱅이는 왜 이렇게 많이 샀어요?" "응, 이건 유통기한도 길고, 갑자기 요리를 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이 양반이 아주 살 판 나셨네!"
매번 쇼핑카트를 살피는 아내의 눈초리는 날카로워 가지만 나는 '진정한 요리'의 탄생을 위해 온갖 변명과 명분을 동원하며 갖가지 소스와 양념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계란말이를 위한 직사각형 뒤집개를 찾아 시장바닥을 헤매기도 하고, 통후추를 즉석에서 돌리며 갈아 뿌리는 후추 통을 딸아이가 출장 간 영국의 벼룩시장에서 사다주는 등, 조리연장들도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요리를 하나 둘 배우고 만들면서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요리를 많이 하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마음씨가 더 따뜻하고 착한지도 모르겠다. 매일 불 앞에서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드는 동안 몸도 마음도 따뜻해질 것이고 또 그 순간만큼은 절대로 몹쓸 생각을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리를 배우며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 아내가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전권을 행사하던 영역에 내가 조금씩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었겠고, 조금씩 늘어난 요리지식을 갖고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여 아내를 화나게 할 때도 있다.
"가지는 칼로 썰지 말고 손으로 찢어야 돼." "가지냉국은 가지를 먼저 양념에 묻혀서 해야 제 맛이 나는 거야!" "양파는 아주 얇게 썰어야 돼, 최대한 아주 얇게! 그리고 찬물에 담갔다가…." 그 순간 파를 다지던 아내의 칼질이 딱! 하고 멈췄다. 주방은 멈춰버린 화면처럼 정지되며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차!' 했지만 이미 아내의 귀를 관통해 버린 망할 단어들을 어찌하리오. 찌릿한 침묵이 몇 초간 흐른 뒤, 아내의 다문 이빨사이로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나! 주부 30년차거든?" "아니…, 라디오에서 그러더라구…." 아내는 마음이 상했는지 밥상 위에는 가지냉국만 달랑 한 그릇 올라왔다. 아~, 맛은 내가 상상하고 그리던 그 맛이건만 기분은 완전 얼어터진 무 씹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겸손한 요리사가 되기 위해 되도록 내 입에 스스로 재갈을 물리고 있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우리 집 점심식탁에는 아이들의 짝꿍들이 초대되고 있다. 벌써 18개월 가까이 해온 이 행사를 통해 앞으로 가정을 꾸릴 아이들에게 좋은 가장으로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부심을 느낀다. 이 땅의 모든 남성들에게 감히 권한다. 남성들이여, 요리를 하세요! 요리가 당신의 인생을 '맛있는 매력'으로 채워줄 것입니다.
서울 강북구 수유5동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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