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전남 완도군 청산도. 선착장인 도청항에서 마을(당리) 안쪽으로 들어서자 군청 직원들이 야트막한 산에 난 돌담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영화 '서편제'에 나온 이후 명물이 된 이 길이 이틀 뒤면 '세계슬로걷기축제'의 무대가 되기 때문이다.
손님맞이를 위해 구들장논과 유채꽃밭을 휘감은 '옛길'을 다듬고 있던 직원 황성식(40)씨는 "걷기축제 때 청산도에 관광객 3,000명 이상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섬의 묵은 길을 걸으면서 자연, 인간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 게 축제의 가장 큰 묘미"라고 말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걷기'에 푹 빠졌다. 걷기문화가 확산되면서 걷기축제와 걷기코스가 곳곳에서 생겨나고 걷기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담조직도 만들어지고 있다.
2007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완도군은 18, 19일 전국 최대 유채꽃 단지인 신지면 명사십리와 청산도에서 제1회 세계슬로걷기축제를 연다.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슬로시티국제연맹은 느림과 여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을 슬로시티로 지정하고 있다. 축제를 하루 앞둔 완도군은 축제의 성공을 예감한 듯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초 700명만 받으려던 청산도 걷기 국내외 참가자 신청이 접수 일주일 만에 1,200명을 넘어서면서 일찌감치 마감된 터였다. 완도군 관계자는 "이번 축제는 완도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호주, 이탈리아 등 슬로시티 지정국을 비롯해 15개국 해외관광객과 국내 걷기 동호회원 등 1만5,000명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강원 고성군도 지난달 28일부터 매월 넷째주 토ㆍ일요일에 현내면 초도리 화진포에서 고성지역 관동별곡 문화답사 등을 포함한 '화진포 일출 걷기 축제'를 열고 있다.
"금강산 자락을 뒤로 한 동해안 천리길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세계적인 걷기 명소로 만들겠다"며 길 트기에 나선 것이다. 고성군은 9월12~18일 동해안 걷기 코스를 6박7일 동안 걷는 '동해안 슬로걷기 축제 2009'도 개최할 예정이다.
걷기 좋은 길 만들기 사업도 잇따르고 있다. 제주 올레(골목길의 제주방언)길이 대표적이다. 서귀포시는 해안을 따라 제주의 아름다운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13개의 트레킹 코스(215㎞)를 개발,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거닐며 관광하도록 하고 있다.
경남 하동ㆍ산청ㆍ함양군과 전남 구례군, 전북 남원시 등 지리산 주변 5개 시ㆍ군은 100여개 마을을 연결하는 '지리산 둘레길(300㎞)'을 내고 있다. 현재까지 새로 열린 마을 길은 70㎞에 달한다. 이밖에 낙동정맥 트레킹 로드(경북도)과 인사동 역사문화탐방로(서울시), 창녕 우포늪 탐방로(경남도), 대구 올레길 조성사업도 한창이다.
자치단체들이 이처럼 걷기를 관광자원화 하는데 앞 다퉈 나선 것은 무엇보다 '큰 돈 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 제주 올레길은 지역경제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들어 3월까지 이 곳을 찾은 사람은 3만9,000여명으로, 작년 한해 방문객(3만명)을 이미 넘겼다. 더구나 방문객 대부분이 체류형 여행자들이어서 이들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주민 소득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서귀포시는 올레길 여행객들이 1인당 10만~60만원을 숙식비용 등으로 써 지난해 100억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낸 것으로 추정했다. 올레길 코스 개발비용으로 1곳 당 평균 1,000만원 안팎의 예산이 들었으니, 걷기만한 '저비용 고효율'의 관광상품이 따로 없는 셈이다.
서귀포시는 '걷기'를 지역 특화 관광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 전담 부서인 슬로관광도시 육성팀까지 만들었다. 김민하 팀장은 "서귀포 해안 걷기코스 조성 이후 체류형 관광객들이 늘면서 지역경제가 숨통이 트이고 있다"며 "특히 걷기 관광상품은 개발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으면서 주민 소득창출 등의 높은 경제적 파급효과를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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