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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꽃' 창비시선 300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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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꽃' 창비시선 300호 나왔다

입력
2009.04.2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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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게 원통하다/ … (중략) …/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신경림 시 '농무'에서)

1970년대 농촌의 피폐한 현실, 농민들의 고난과 분노를 형상화한 신경림 시인의 시집 <농무> . 1975년 3월 <농무> 로 문을 연 '창비시선'은 한국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의 한국 시의 흐름은 내면의식의 탐구, 혹은 전통적 서정주의의 답습 등이었지만, <농무> 가 웅변하는 창비시선의 시집들은 당대 현실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를 낼 것을 주문했다.

1번 시집 <농무> 로 출발한 창비시선이 20일 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박형준, 이장욱 편) 출간으로 34년 만에 300번 출간의 금자탑을 쌓는다. <걸어던 자리마다…> 는 고은, 정희성, 정끝별씨 등 창비시선의 201번에서 299번까지 시집을 낸 시인들의 시를 '사람과 삶'이라는 주제 아래 한 편씩 묶은 시선집이다.

창비시선은 1978년 첫 선을 보인 문학과지성사의 '문학과지성 시인선'(현재 358권)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양대 산맥을 이룬 시집 시리즈다. 문지시인선이 실험성, 전위성, 언어의 탐구 등 모더니즘의 미학적 전통을 계승해왔다면 창비시선은 민중적 서정성, 참여적 사실주의 등 리얼리즘의 과제와 씨름해왔다.

문학이 문학 이상의 목소리를 내야 했던 1970~80년대 창비시선은 늘 권력과 긴장관계였다. <국토> (조태일ㆍ1975)를 시작으로 <한국의 아이> (황명걸ㆍ1976),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ㆍ1982) 등 6권의 시집은 판매금지를 당했고, <타는 목마름으로> 를 낸 뒤에는 당국으로부터 세무사찰을 받기도 했다.

창비시선을 통해 가장 많은 시집을 발표한 시인은 신경림씨(9권)이며 고은씨(7권)와 고 조태일 시인, 김용택, 정호승씨(이상 6권)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출판사에 따르면 300권 가운데 최고 베스트셀러는 최영미씨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4)로 지금까지 50만권 이상 팔렸다. 이 시집은 출간까지 남다른 사연이 있다. 최씨가 출판사에 처음 보낸 원고는 "창비시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초 출간이 보류됐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되돌아온 원고를 묶어 시집이 나왔다.

시집 제목도 처음에는 최씨의 요청에 따라 '마지막 섹스의 추억'으로 정하고 표지 인쇄까지 마쳤으나, 당시 창작과비평사의 영업 담당자였던 한기호 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의 설득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집은 운동권의 퇴조라는 1990년대초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큰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대중과 호흡해온 창비시선의 현대적 서정주의는 많은 스타 시인과 베스트셀러 시집을 낳았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1999~2009년 창비시선 중 가장 많이 팔린 10권의 시집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 를 비롯, 정호승씨의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포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 이병률씨의 <바람의 사생활> , 나희덕씨의 <어두워진다는 것> , 문태준씨의 <맨발> , 신경림씨의 <낙타> , 안도현씨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 와 창비시선 200번 기념 시선집 <불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신경림 편)였다.

김용택, 안도현, 손택수, 문태준, 박성우 시인 등으로 현대적 서정주의라는 흐름을 이어가면서도 창비시선은 2000년대 이후에는 변화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자기갱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도시문화 체험을 통해 성장한 세대들의 새로운 감각의 수용이 그것이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이기인ㆍ2005), <평일의 고해> (정영ㆍ2006),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김근ㆍ2008) 등의 시집은 새로운 세대와의 소통을 꾀하는 창비시선의 미학적 도전으로 평가된다.

300번 출간을 맞은 창비시선은 변화한 현실에서 리얼리즘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ㆍ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시인 손택수씨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리얼리즘은 사실상 폐허가 됐고, 지금 다시 창비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새로운 성찰과 언어로 리얼리즘에 대한 창비의 자기고집을 발전적으로 전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창비시선 기획위원인 시인 이시영 단국대 초빙교수는 "창비시선은 '현실에 대한 응전'이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람 사는 세상과의 소통을 꾀해왔다"며 "'감각의 해방'이라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수용하면서도 응전력을 갖춘 시들을 주목할 것"이라고 말했다.

■ 북콘서트·시집 낭독회… "기념행사도 놓치지 마세요"

출판사 창비는 '창비시선' 300번 발간을 기념, 여러 행사를 마련했다.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KT&G 상상마당에서는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신경림 이시영 김사인 나희덕 문태준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비시선의 흐름과 회고'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연다. 가수 안치환, 민설, 반지 등의 공연이 어우러지는 북콘서트도 함께 열린다.

24일에는 '창비시선'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이 함께하는 축하연이 열린다. 23일부터 5월말까지는 주요 온ㆍ오프라인서점을 통해 <농무> (신경림ㆍ1975), <사평역에서> (곽재구ㆍ1983), <섬진강> (김용택ㆍ1985), <인간의 시간> (백무산ㆍ1996), <가만히 좋아하는> (김사인ㆍ2006) 등 시기별 주요 시집 36권의 시인 자필사인본 판매행사가 진행된다.

시인과 독자가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행사도 준비됐다. 24일부터 6월말까지 신경림 이시영 정호승 김선우 손택수씨 등 30여명의 시인이 수원 광주 울산 안동 부산 대구 전주 제주 등 전국 10여개 지역에서 시집 낭독회를 연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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