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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아련히 떠오르는 그때 그맛!… 경양식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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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아련히 떠오르는 그때 그맛!… 경양식의 재발견

입력
2009.04.17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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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양식의 추억

경양식은 '간단한 서양식 일품요리'를 말한다. 주로 스튜나 스테이크, '까스'라 부르는 커틀릿 종류가 주 메뉴다. 종류를 늘리다 보면 오므라이스나 해시 라이스도 넣을 수 있지만, 고기로 만든 주 요리에 스프와 탄수화물을 곁들이는 것이 정석이다.

탄수화물이란 다름 아닌 밥 또는 빵. 그래서 경양식을 주문할 때 꼭 듣게 되는 질문이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스프는 크림스프로 드시겠습니까? 야채스프로 하시겠습니까?" 두 가지다.

나는 꼬마 때 엄마 손 잡고 시내에 나가면 오늘은 경양식을 먹게 되나 기대했었다. 뭐, 그 때야 경양식과 양식을 구분할 나이가 아니었으니 경양식을 막연히 '외국 음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기호는 늘 한 가지로 압축되었는데, 스테이크와 크림수프에 빵으로 먹었다. 경양식집을 엄마 없이 가 본 기억은 여학생 시절, 명동으로 단체 관람을 갔을 때였다.

명동성당 앞, 당시 중앙극장에서 로저 무어 주연의 '기적'을 보게 되었는데 버스에서 내려 극장까지 가는 길목마다 '경양식 일절'이라 간판을 내건 레스토랑이 잔뜩 눈에 띄는 거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학생 출입 금지' 지역이던 컴컴한 경양식집에 친구 둘을 이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들어선 경양식집. 그 곳에 들어서던 순간,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우리끼리' 경양식집에 가봤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지, 그 날 먹은 음식에 관한 인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곁들여 나온 노란 단무지가 세로로 썰어져 있었고, 우리는 단무지를 더 달라는 말도 못하고 조금씩 아껴 먹었던 것 정도의 찌질한 추억으로 남았다.

■ 2009년 인천

80년대까지 남아 있던 경양식집이 막상 성인이 되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90년대가 되자 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외국산 햄버거 체인이 들어오고, 피자 체인이 문을 열고, 배달 음식이 늘어나고, 양념 치킨과 패밀리 레스토랑이 인기를 얻었다.

피자집에 모여 앉아 '샐러드 바' 돈을 한 번만 내면 마카로니와 각종 생야채, 달걀 샐러드와 감자 샐러드를 무제한 먹을 수 있었으니 조도가 낮은 경양식집은 순위권 밖으로 밀릴 밖에. 제대로 만든 경양식 한 번 먹고 싶다고 말만 하다가 십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인천에 한두 곳, 옛날 먹던 그대로 경양식 하는 집들이 남아 있다고 들은 지 꽤 되었지만 사실 이 정도로 맛있을 줄은 몰랐다. '국제 경양식'과 '등대 경양식' 두 곳의 명성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만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 중구, 우체국이 보이는 대로변으로 돌자마자 '등대 경양식'이라는 다정한 이름이 보였다.

12시 조금 안 된 시각, '등대 경양식' 안으로 들어갔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패스트푸드점에 비해 월등히 낮은 조도가 나를 반겼다. 그래, 바로 이거야. 경양식집이라고는 하는데, 너무 밝거나 현대적인 분위기면 어찌 하나 내심 걱정하던 나는 어느새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살구색 커튼이 쳐진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으니 주문을 받으러 왔다. 스테이크와 크림수프, 밥 대신 빵을 주문했다. 20년이 지났어도 내 취향은 똑같았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해.

■ 스테이크, 크림수프, 빵

소스를 얹은 등심 스테이크가 등심답지 않게 야들야들 썰렸지만 씹는 맛은 남아 있고 익힘이 적당했다. 스테이크와 스튜의 중간 맛을 내는 듯 소스의 양도 넉넉했다. 한 접시에 나온 다진 양배추를 소스에 적셔가며 함께 먹으니 아삭아삭한 식감이 더해져 입맛이 살아났다.

아, 스테이크 전에 나온 크림수프와 빵을 먼저 이야기해야지. 크림수프는 육수를 내서 만든 맛. '3분'시리즈로 어설프게 저어 먹는 맛이 아닌, 밀가루와 버터를 볶다가 육수를 부어 만든 것 같은 고소하게 밀가루 볶은 맛이 났다.

따뜻하게 나오는 빵은 윤기가 돌고 버터와 사과잼이 함께 서빙되었는데, 잼을 발라 먹다가 스프에 찍어 먹으니 맛이 좋았다. 혹시 레드 와인을 한 잔 마실 수 있는지 여쭈었더니 고전적인 맛이 나는 크리스털 잔에 담겨 나왔다. 포트와인처럼 약간의 당도가 있고 날카롭지 않은 와인까지 더해 한 입 한 입이 행복한 순간.

정오가 막 넘자마자 사람들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멀리서 나들이 온 이들과 인천 주민들이 저마다 경양식을 주문하고, 취향대로 밥이며 빵을 골라먹는 모습이 흥겨웠다.

주방에서 이 사람들의 점심밥을 혼자 다 만드시는 사장님께 계산해 달라고 여쭙기가 죄송한 순간, 수고롭게도 주방 밖까지 나와 주셨다. 38년째 운영 중이라며 곱게 웃으시던 모습에서 왜 '미모'하면 인천 여인들이 반드시 꼽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우신 사장님의 고우신 손맛 보러 나는 이제 한 달에 한 번 인천행 지하철을 탈 것 같다.

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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