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만난 '줌머족' 로넬 차크마(42)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7세 때 처음 총을 들었다고 했다. 줌머족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 였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줌머족이 사는 치타공 산악지대를 영토로 편입한 이후 갖은 폭력을 가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2000년까지 줌머족 75만명 중 2,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직전 파키스탄 치하 때도 이들은 정부의 일방적 수력발전소 건설 탓에 경작지의 40%가 수몰되는 시련을 겪었다.
게릴라군이 된 차크마씨는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70여 명과 함께 해발 1,000m 이상 산을 넘어다니며 풀숲에서 잠을 청했다. '군자금'을 마련하려 정부 관리의 집을 털다 "총알이 머리 위로 휭휭 날아다닌" 적도 있다.
같이 게릴라군에 뛰어든 친구 3명은 전사했다. 그도 정부군을 죽인 혐의로 3년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정보기관의 감시가 늘 따라다녔다.
차크마씨는 핍박 받는 줌머족의 현실을 알리려 1994년 한국행을 결행했다. 한국을 택한 것은 같은 몽골계인데다 자신이 믿는 불교 신자가 많기 때문. 가구공장 등에서 일하며 2004년 난민 인정을 받았다. 한국에는 그의 동족 50여명이 경기 김포 등지에서 살고 있고, 18명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그는 오랜 방랑 끝에 안식처를 찾았지만, 2006년 방글라데시에 있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라고 말하는 '전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차크마씨처럼 정치ㆍ종교적 박해를 피해 한국을 찾는 '디아스포라'(과거 유대인처럼 흩어져 유랑하는 민족)들이 늘고 있다.
2008년 현재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만 101명으로, 국내 거주 유랑인은 이보다 훨씬 많다. 난민 신청이 시작된 지 7년 만인 2001년 에티오피아인 1명이 첫 난민 인정을 받았고, 이후 2006년 11명, 2007년 13명, 2008년 36명으로 매년 인정자 수가 늘고 있다.
국적별로는 미얀마 출신이 42명으로 가장 많고, 방글라데시 19명, 콩고민주공화국 13명, 에티오피아 7명 순이다. 지난 15년 동안 난민 신청자 수는 2,168명에 이른다.
난민 인정자 수에서 보듯 한국에서 가장 많은 디아스포라는 미얀마 출신들이다. 군정의 폭압을 규탄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의 해금을 요구하며 미얀마대사관 등에서 집회도 꾸준히 열고 있다.
버마액션코리아,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등을 통해 100여명이 활동중이다. 이들은 "수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잔악한 역사를 지우려 바꾼" 국명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2004년 난민 신청을 한 아웅 틴툰(34)씨는 고1 때인 1988년 버마 민주항쟁에 참여했다. 함께 항쟁한 삼촌은 직장(통신사)에서 해고됐고, 형도 유치장 신세를 졌다.
탄압에 시달리던 그는 1994년 고국을 떠나 한국에 왔다. 현재 이주노동자방송 교육담당을 맡아 이주민들의 정착을 돕고 있는데, 이 달 말 열리는 고양꽃박람회에도 통역으로 참가한다.
티베트 출신인 S(28)씨는 19세 때 히말라야를 넘었다. 이름만 말해도 어머니가 놀라 나무라던 달라이 라마가 있는 인도 다람살라로 가기 위해서 였다. 티베트어도 마음대로 못 배우는 현실에서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궁금했단다.
그 뒤 다람살라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아 2006년 12월 한국에 왔다. "티베트에 있는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조용히 살았다"는 그는 지난해 4월 티베트 유혈사태가 터진 뒤로 10년 동안이나 뵙지 못한 부모님 걱정이 더 커졌다고 했다.
이처럼 유랑민들의 한국 행이 늘고 있지만, 이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편안한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93년 출입국관리법에 난민 조항을 신설했다.
그러나 5%도 채 안되는 난민 인정률에서 알 수 있듯이 심사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어렵사리 난민 인정을 받아도 실질적인 혜택이 별로 없다. 난민에 대한 처우를 규정한 법률이 없는 탓이다.
여권 대용으로 발급되는 '난민여행증명서'는 은행 등에서 거절되기 일쑤다.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는 '난민협약'과 달리, 사실상 불법체류자 신세만 면하는 것이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난민신청자 등 3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1%가 "어떠한 형태의 의료보험도 없다"고 답했다.
진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은 "아직 난민에 대한 풍토나 지원제도 모두 한국은 황무지나 다를 바 없다. 이들이 마치 돈만 벌기 위해 온 것으로 여기는 시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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