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생을 냄새 없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았다면 서쪽으로 서쪽으로만 고개를 드는 바람이었을 것이고
내 전생에 소리내어 사람 모은 적 있었다면 노인의 품에 안겨 어느 추운 저녁을 지키는 아코디언쯤이었을 것이고
그 전생에 일을 구하여 토끼같은 자식들을 먹여살렸더라면 사원에 연못을 파며 땟국 전 내력을 한스러워하는 노예였을 것이고
그전 전생에도 방랑을 일삼느라 한참을 떠돌았다면 후생에라도 다시 살고 싶어지는 곳에 돌 하나 올려놓았을 것이고
하여 이 생에서는 이리도 무겁고 슬프고
살면서 쓸쓸해지는 순간이 오면 사람들은 전생이나 후생을 이야기한다. 전생에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후생에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찾아오게 될까. 믿든 믿지 않든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쓸쓸하면 할수록 우리들은 사람으로는 다시 이 세상을 찾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생에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든 바람이든 나비든 뭐든 어디에도 매여있지 않은 삶. 서쪽으로만 부는 바람, 추운 저녁을 지키는 아코디언, 사원에서 연못을 파는 노예, 방랑자로 이어지는 이병률의 따뜻한 전생 이야기는 쓸쓸한 순간을 견디게 하는 시가 된다.
시인은 지금의 생이 무겁고 슬퍼서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그가 따뜻한 시인이 아니었다면 그 많은 전생들에게 이런 따뜻한 옷을 입힐 수 있었을까?
덧붙이자면 나도 다음에 태어나면(물론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라는 단서에 붙혀진 바램이 하나 있다. 다른 생명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런 생명이었으면 좋겠다…, 는 것. 그러니 돌이나 물이나 그런 건 아닐까? 오늘, 조금은 쓸쓸한가 보다. 이병률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그렇다.
허수경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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