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인간게놈 프로젝트가 30억쌍의 인간 DNA 염기서열을 완전히 해독해 내기 전까지 연구자들은 인간의 유전자 수가 10만개 이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사람의 유전자는 그 3분의 1도 안 되는 2만~2만5,000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간보다 단순한 동물로 꼽히는 애기장대(2만5,000개)나 파리(2만개), 꼬마선충(1만9,000개)과 비교해서 가동하는 유전자 수가 별반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인간의 고등한 능력을 설명하는 특별한 유전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유전자 구성에서도 인간은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DNA 염기서열은 침팬지와 98.7%가 같고, 쥐와는 90%가 일치한다. 이렇게 유전자가 비슷하다면 쥐와 사람, 침팬지와 사람 사이의 크나큰 차이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했을까.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ㆍ약칭 이보디보ㆍEvo Devo)은 생물종이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를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익힘으로써 진화해 왔다는 생명 진화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 뒤늦게 만난 진화론과 발생학
1940~50년대 다위니즘이 부활한 시기에 여기에 융합되지 못한 분야가 발생학이었다. 진화생물학과 발생생물학은 시간에 따라 생물의 형태 변화를 추적하는 별개의 분야로 여겨져 왔다. 발생과정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고 개체마다 순환되는 반면 진화과정은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진화발생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의 가장 최신 분야로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발생과정이 유전 변화에 의해 어떻게 진화했고, 이러한 변화들이 어떻게 다양한 생물종의 분화를 만들었는지를 밝혀내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발생생물학이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초파리와 사람과 같이 서로 전혀 다른 동물들이 비슷한 유전자들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다. 1984년 초파리에서 180개 염기쌍으로 이루어진 '호메오박스' 부분을 공유하는 유전자들이 발견됐다.
호메오박스(줄여서 혹스) 유전자라고 하는 이 유전자들은 다른 유전자의 활성 명령을 내리는 단백질을 만들고, 이렇게 활성화된 유전자들은 연쇄적으로 다른 유전자를 작동시켜 머리 가슴 팔다리 등 신체부위를 있어야 할 곳에 만든다. 즉 혹스 유전자는 초파리 수정란이 하나의 성체가 되기까지 발생과정을 관장하는 수뇌부인 것이다.
더구나 사람과 같은 척추동물도 역시 혹스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발표됐다. 1989년경 포유동물 혹스 유전자들이 초파리 혹스 유전자와 비슷한 구조와 유전자 표현 양상을 보인다는 증거들이 나왔다.
이후 여러 종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혹스 유전자들이 확인되고 있다. 요컨대 혹스 유전자들은 이 생물들의 오래된 공동 조상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억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몸체 부분을 특정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 오래된 유전자를 새롭게 써먹기
이렇게 유전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다면 초파리와 사람 사이의 엄청난 형태 차이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비밀은 유전자의 조절부위에 있다. 조절부위란 유전자가 발현(DNA의 이중나선이 풀려 RNA를 거쳐 아미노산을 만들어 단백질을 구성하는 것)하도록 하는 스위치와 같은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하나하나의 핵에 23쌍의 염색체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 모든 세포들이 똑 같이 30억쌍의 염기서열로 구성된 게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모든 세포가 모든 유전자를 다 작동시켜 단백질을 만들지는 않는다. 필요한 소화액을 분비하는 특정 유전자는 간에서 발현하고, 털을 만드는 특정 유전자는 피부에서 발현하는 식이다.
수정란이 성체로 발생하는 것도 특정 부위에서 뼈, 사지, 장기 등을 만드는 특정 유전자가 발현되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어떤 단백질이 만들어지느냐는, 그 부위에서 어떤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껴지느냐에 달려있다.
물론 애완견의 한 품종인 그레이트 피리네의 경우 발가락 발생에 관계하는 Alx-4의 돌연변이에 의해 발가락이 하나 더 생기는 사실에서 보듯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새로운 형태가 진화하는 일도 있다.
반면 유전자는 변하지 않되 유전자를 켜고 끄는 조절부위가 변이를 일으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증거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 가령 초파리종에서 날개 점무늬가 나타나는 양상은 서로 다른 유전자의 발현이 아니라 옐로(yellow) 유전자를 어디에서 켜고 끄느냐 하는 조절부위의 변화에 달려있다.
또한 민물과 바다에 사는 가시고기는 怠컥愍?종류에 따라 가시를 길거나 짧게 만드는데, 이 역시 뒷다리(사지동물의 뒷다리는 어류의 배지느러미의 다른 형태에 해당한다) 형성에 관여하는 Pitx1 유전자가 켜지거나 꺼지도록 변이를 일으킨 결과이다. 생물종의 변화는 유전자의 개수가 아닌 유전자의 조절에 달려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 생물종 진화는 유전자 활용에 달려있다
다양한 형태로 진화한 포유동물의 예를 들어보자. 쥐는 목이 짧고 거위는 목이 길며 뱀은 사실상 목이 없이 몸통만 있다. 사지동물은 목과 몸통의 경계에 앞다리(날개는 앞다리의 변형이다)가 형성되기 때문에 쥐와 거위는 목 아래부터 앞다리나 날개가 형성된다. 그런데 뱀은 목 없이 두개골 밑에 바로 몸통이 붙은 형태여서 앞다리가 아예 없다.
이러한 형태의 차이는 혹스 유전자 중 하나인 혹스c6 유전자가 발현하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쥐는 두개골로부터 가까운 곳에서부터 혹스c6가 발현하는 반면 닭이나 거위는 두개골로부터 보다 먼 곳에서 혹스c6가 발현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혹스c6가 발현하는 부위에서 등뼈가 형성되며, 두개골에서부터 등뼈까지 사이는 목뼈가 된다. 뱀의 경우는 두개골에 인접해서 혹스c6가 발현하기 때문에 아예 몸통 전체가 등뼈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를 들여다보면 쥐부터 뱀까지 포유동물들은 기본 구성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반복하는 모듈식으로 신체형태를 구성한다. 서로 다른 종들은 각각 다른 유전자를 진화시킨 것이 아니라, 똑같은 혹스c6 유전자를 발현하는 스위치를 변화시켰다. 신체 부위를 만드는 유전자는 같지만 이를 어디에서 켜고 어디에서 끄느냐에 따라 상이한 형태의 종들이 진화한 것이다.
결국 초파리나 침팬지, 사람의 무수한 차이와 다양성은 일부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같은 유전자를 어떻게 써먹느냐에 달려있다. 사람과 애기장대의 유전자 개수나, 사람과 침팬지의 게놈 염기서열이 중요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유전자 구조의 변화가 아닌 조절의 변용에 의존하면 발생 양상을 대규모로 변화시키지 않고도 엄청나게 다양한 조합에 따라 진화적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유전자를 수백만개까지 늘리지 않아도 수백개의 유전자를 어디에서는 켜고 어디에서는 끄는 식으로 적절히 조합하면 수백만개 유전자보다 더 다양한 변화가 가능해진다. 유전자 조절부위에는 단 하나의 스위치가 있어서 켜지거나 꺼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스위치가 조합됨으로써 특정 부위에서 켜지거나 꺼지는 식으로 통제된다.
예를 들어 둥근 공 모양의 배아를 지구에 비유해 A 유전자 조절부위에 ▲북반구 전체에서 켜지는 스위치와 ▲서경 전체에서는 꺼지는 스위치 2개가 존재할 경우 A 유전자는 북반구 동경에서 발현한다. 이런 식으로 작동을 시작한 A 유전자는 또 다시 일련의 유전자 발현 스위치를 연쇄적으로 켜거나 끄는 역할을 함으로써 극도로 복잡한 신체를 구성할 수 있다.
■ 종 다양성의 비밀은 '레고상자'
결국 진화발생생물학자가 보면 생물종의 블랙박스는 어린이 장난감인 레고상자와 비슷하다. 레고의 여러 종류들, 예를 들어 우주선ㆍ미국 서부ㆍ중세 등으로 분류된 상자를 열어 보면 상자마다 같은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특정 상자에만 있는 특수한 조각들이 있다. 이러한 조각들을 조합해 다양한 레고 조형물이 만들어진다.
다양한 생물종은 조합된 레고 조형물에 해당한다. 상자마다 공통된 레고 조각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공통 특질(혹스 유전자와 같은 공통 유전자)이고, 상자마다 특이한 조각들은 최근에 생물들이 확보한 혁신 특질일 것이다.
생물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오랜 지질시대에 걸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들이다. 진화발생생물학의 새로운 통합적 관점으로 우리는 생물을 보다 정밀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생물체의 엄청난 다양성은 생물의 내외적 요소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자연이 이 관계에 관여하면서 끊임없이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한 생물체의 위대성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이를 보존하고 지속가능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현명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 인간도 이처럼 현재진행형인 거대한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다.
김창배·상명대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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