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별, 시를 만나다] (15) 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별, 시를 만나다] (15) 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입력
2009.04.15 23:57
0 0

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 - 조연호

평광선(平光線)과 횡광선(橫光線) 아래

씨앗 망태를 들고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다.

몸을 비틀고 불구를 안고 있는 밤

긴 외랑 기둥 하나를 깨물고서야 나는 이제 헤맬 수 있게 되었다.

복서(卜書)에 얼굴을 비춰 보거나

기자(奇字)에 털을 묻히거나

사람을 낳은 신의 옷을 얻어 입는 따위의 하찮은 즐거움으로

겨울을 두드려 본다.

문장마다 반드시 초조해지는 강에

우린 얇은 얼굴을 띄웠다.

(그런데 사실은 그대로 되지를 않았다)

축마(畜馬)와 함께

이가 흔들릴 때마다

사탄이 내 어금니를 찌른다고 고함치기

(이게 대체 무엇에 쓸 수 있는 진심인가)

종자 더미에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야말로

씨앗 이외로는 자신을 불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

밤의 등 근육이 흰 똥으로 이 인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때때로 작은 편지들이 내게 돌을 굴려 보는 날에

노래가 천민의 둥지인 건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 가는 날에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

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꺾인 나뭇가지 같은 이 하늘 밑에서

여(余)는 남의 일기 위에 부디 설명 같은 눈물을 흘려라.

* ‘A rabid dog of Arcadia’. 1746. Nicolas Kossoff.

● 1746년에 그려진 ‘아르카디아의 광견’은 시인이 창작해낸 위작(僞作)이다. 위작에 대해 진실처럼 이야기하는 것, 움베르토 에코가 즐겨 쓴 수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의 시가 위작에 대해 저처럼 절실히 노래하고 있으니, 이미 저 그림은 진실인 것을!

나도 시인과 나란히 그림 앞에 서본다. 그림은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 우주는 순 소리로만 되어있다. 렌즈가 아닌 소리로 찍은 우주의 사진! 과학자들이 발견했듯, 흐느껴 우는 공들처럼 별들은 소리를 낸다. 우주는 보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을 내려놓고 귀로, 마음으로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별에게 위안을 받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가까이 내려온 밤하늘 아래서 별들의 소리를 흉내 내며 흥얼거리는 이가 아닌가? 그렇게 인간들은 노래 안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러니 노래는 천민의 둥지, 노래는 별들과 우리 사이에 길게 늘어진 실타래. 쿵쿵, 실을 타고 서로의 심장 소리가 우주를 건너오네.

서동욱(시인ㆍ서강대 철학과 교수)

■조연호 1969년 생.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 .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