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7시 서울대 인문대 신양관에선 '공자의 윤리학'을 주제로 한 강좌가 열렸다. 김월회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의를 듣는 이들은 다름아닌 전ㆍ현직 노숙인들. 노숙인 교육기관인 성프란시스대학(학장 임영인 신부)이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소장 김남두 교수)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인문학 심화과정의 첫 시간이다.
국내 최초로 2005년부터 1년 과정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를 운영 중인 성프란시스대학은 올해 처음 심화과정을 개설했다. 더 깊은 배움에 목말라 하는 수료생 및 재학생을 위한 자리로, 20회에 걸쳐 세계 문명과 철학을 강의한다.
강좌 개설을 주도한 안성찬 서울대 독문과 교수는 "3년간 노숙인들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높은 교육열을 계속 충족시켜줄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기 재학생 18명과 수료생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강의는 <논어> <예기> 등 동양 고전과 니체, 들뢰즈 등 서양 사상을 횡단하는 녹록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는 사람 하나 없었고, 질문은 날카로웠다. 예기> 논어>
공자의 중용(中庸)은 범접 못할 경지가 아닌 누구든 노력해 얻을 수 있는 덕(德ㆍ힘)이라는 교수의 해석에 한 수강생은 "힘뿐 아니라 지혜를 겸비해야 치우침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중용이 어려운 것 아니겠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논어> 에도 지(知)와 예(禮)를 중용의 또 다른 덕목으로 꼽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논어>
또 다른 이는 "<성경> 처럼 공자 사상도 결국 제자들의 기록이므로 공자가 생각한 중용의 참뜻을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강의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질문이 이어지자, 결국 진행진이 나서 수강생들을 말려야 했다. 성경>
밤이 깊어서야 강의실을 나선 수강생들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4기 수료생 권모(57)씨는 "서울대에서 공부하니 명문대에 편입한 듯해 기분 좋다"며 웃었다. 정장 차림의 임모(51ㆍ5기)씨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생계 해결도 버거운데 인문학 공부는 사치 아니냐는 물음에 수강생들은 "밥보다 중요한 것이 삶을 변화시킬 의지"라고 반박했다. 최모(45ㆍ2기)씨는 "돈과 출세만 바라보고 살다가 노숙자가 돼서 절망할 때 인문학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삶을 버리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노숙 생활을 청산하고 돈벌이보다 자아실현을 위해 살고 있다"며 "하찮게 살지 말라는 주변의 타박에 맞서 소신을 지킬 힘을 얻으려고 다시 강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사업 실패 이후 알코올 중독과 언어 장애에 시달렸던 문모(50ㆍ4기)씨는 "<그리스인 조르바> 를 읽으며 삶이 통째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진정한 자유인인 조르바가 내게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날로 문씨는 술을 끊었고 상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인>
임영인 신부는 "인문학 강좌 수료율이 65%에 달하고, 올해는 20명 정원에 55명이 몰려드는 등 지원율이 해마다 높아진다"며 "숙식을 해결하려 정처없이 떠도는 노숙인들의 삶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을 통해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클레멘트 코스'라고 부른다. 성프란시스대학의 심화과정 개설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의 질적 향상을 뜻한다면, 서울시가 경희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성공회대와 함께 노숙인과 저소득층을 상대로 열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양적 성장을 보여준다.
안순봉 서울시 자활정책팀장은 "지난해 시범운영 결과 수강생의 강의만족도가 82%, 긍정적 변화를 느꼈다는 응답이 95%에 달했다"며 "클레멘트 코스 도입으로 현물 지원 위주의 복지정책에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노숙인시설 '가나안 쉼터'에선 함종호 서울시립대 교수의 문학 강의가 열렸다. 김소월, 박노해, 이정하의 시를 놓고 '문학적 순위'를 매겨보는 자리에 30여명의 수강생들은 저마다 논리를 세우며 적극 수업에 참가했다.
맨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경청한 이모(43)씨는 "노숙 생활 중 잃어버린 짐 중에 시 습작 노트들이 유독 아깝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끄적인 글이라고 했다.
10년 넘게 성실히 일한 동대문 의류공장이 지난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뒤 술독에 빠져 거리에 나앉았던 그는 인문학 강의가 "다시 짚고 일어설 삶의 버팀목"이라고 말했다.
그는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갔지만 등록금을 못내 포기했는데, 교수님들 강의를 들으며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어 좋다"면서 술을 완전히 끊고 다시금 시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클레멘트 코스
노숙인, 재소자 등 사회 소외 계층에게 대학교 교양 과목 수준의 문학, 역사, 철학을 가르쳐 '정신적 궁핍'을 해소시키는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얼 쇼리스가 1995년 뉴욕에서 처음 개설했으며,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이 의사가 되는 등 성공적 결실을 거뒀다. 현재 전세계에서 60여 개 강좌가 운영 중이다.
■ '폐강 수난' 인문학의 화려한 외출
상아탑 안과 밖에서 인문학이 받는 대접이 판이하다. 대학가에선 올해도 인문학 강좌의 폐강이 이어졌지만, 대학 바깥에선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3월 각 대학의 수강신청 마감 결과 최소 수강인원 10~20명을 넘기지 못해 문을 닫은 문사철(文史哲ㆍ문학 역사 철학) 강좌들이 속출했다.
고려대는 '문화의 철학적 이해' '동아시아 문명사' 등이 폐강됐고, 연세대의 폐강 교양과목 13개 중 절반이 '문학과 사회'를 비롯한 인문학 강좌였다. 서울대는 '한국 고전문학과 성' '한국 고대사회의 고고학적 이해' 강좌가 다른 기초과학 과목 2개와 함께 사라졌다.
대학가의 냉대와 달리 일반인 대상 인문학 강좌는 성황을 누리고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수유+너머' 등 소수의 학문 공동체나 사설 교육기관에서 운영했지만,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 서울역사박물관, 대학, 지역 도서관 등 강좌 개설처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다.
초기엔 직장인이나 중산층 위주로 운영됐지만, 최근 노숙인, 장애인 등 사회 소외계층까지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정부도 2년 전부터 우수 강좌에 대한 자금 지원에 나섰다.
'인문학 르네상스'의 도래는 경기 불황, 비인간화 등 사회 위기 징후의 심화와 맞물려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위기의 시대엔 삶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본원적 관심, 즉 인문학적 물음이 폭발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침체에 빠진 인문학의 활로도 '저잣거리'에 있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는 "인문학이 성찰의 임무를 수행하려면 사람 사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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