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C'est si bon)이라는 음악 감상실을 생각하면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할 것이다. 이곳을 흔히 청년 문화의 산실이라고 불렀다.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 집'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나 뿐만이 아니라 이 음악 감상실에서 살다시피 했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만큼 편했고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비싸지 않은 입장료만 내고 들어가면 음료수 하나를 제공 받고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갈 곳 없는 젊은이들에게는 고마운 '내 집'인 것이다. 흔히 무교동에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서린동이다. 이 글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일보 김성우 선배는 이 집을 아주 좋아했다. 프랑스의 살롱문화와 같다는 것이다.
음악평론을 하던 이백천과 나는 허구 헌 날 이 집에서 살았다. 음악감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때 한국일보의 자매 주간신문인 '주간한국' 소속으로 연예기자를 하고 있었다.
그 주간한국 주최로 몇 가지 행사를 했는데 '성점감상실', '신곡합평회', '시인 만세 시 낭송 콘테스트', '신인 가수 콩쿠르' 등등이었다. 행사의 사회는 이백천 외에도, 성우인 피세영과 홍익대 재학생이던 이상벽, 그리고 가수인 김상희, 위키리등이 수고를 했다. 이백천은 TBC(당시의 동양 TV)에서 쇼 프로그램 PD를 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연예관계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원래 민들레라는 악단에서 클라리넷을 불기도한 재주가 많은 사람이며 나하고는 아주 친하게 지냈다. 피세영은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아들로서 성우 생활을 하다가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이상벽은 타고난 끼가 있어서 대학 졸업후에 경향신문의 자매지인 주간경향에서 연예기자를 했으며 KBS 아침마당 진행으로 유명해졌다. 지금은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며 나 하고는 친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세시봉의 주인인 이흥원 선생은 나와 이백천, 두 사람한테 아예 감상실 열쇠를 맡겨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제집인 것처럼 밤새 모여서 다음 주에는 무슨 행사를 할까 하는 회의를 하곤 했다.
감상실에 오는 학생들에게 원하는 프로그램을 요청 받아서 무료 콘서트를 많이 했는데 그 때 데뷔한 가수들이 많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 폴리오, 서유석, 신중현의 애드 포, 이장희, 김세환, 이수영 임창제의 어니언스 김민기, 양희은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세시봉과 인연이 깊다. 특히 어니언스는 내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돈이 없다고 휴학 중이던 조영남이 "무대에 나가서 노래 좀 부르게 해 달라"고 하도 조르는 바람에 올라가라고 했더니 기타를 치며 컨트리 송을 신나게 불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것이 조영남의 가수 데뷔 계기가 됐다.
바네사 메이, 유진 박 등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파격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을 요즘 자주 볼 수 있는데 사실은 60, 70년대에 세시봉에서 이미 그런 콘서트를 했다. 미군부대에서 공연을 하던 김동석이 그 주인공인데, 그는 키가 작달막했지만, 바이올린을 아주 다이나믹하게 연주해서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그가 세시봉에서 연주를 할 때는 몇 명의 미군 팬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다. 신중현도 미군부대에서 쇼에 출연했는데, 미군들은 김동석을 빅재키, 신중현을 리틀재키라고 불렀다. 두 사람이 키가 작기는 마찬가지인데 김동석이 나이가 몇 살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단 한번이라도 세시봉을 다녀가지 않은 이는 없다고 봐야 한다. 최희준, 박형준, 위키리, 유주용, 패티김, 이미자 등 가수들, 길옥윤, 이봉조, 박춘석, 김강섭, 정민섭, 정풍송 등 작곡가는 물론이고, 최무룡, 신성일, 엄앵란 등 배우들.
몇 년 전에 어떤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유재건 국회의원이 나를 보더니 아주 반가워했다. "옛날에 제가 대학 다닐 때 세시봉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때 정 선생을 자주 뵈었습니다." 라고 했다. 아마도 이런 인연이 도처에 많을 것이다.
주인인 이흥원 선생은 젊은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얼마 벌지도 못하면서 돈을 조금씩 아껴서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에게 '세시봉 패밀리'를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세시봉에 오는 출연자들이나 학생들을 통틀어서 가족형식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형편 되는대로 기금을 모으면 좋은데 쓸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세시봉에서 꿈을 키우던 젊은이들이 지금 나이가 들어 같이 만난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이곳에는 청바지나 통기타만 있었던 곳이 아니다. 열띤 토론이 있었고, 시 낭송이 있고, 소설에 대한 소견 발표도 있었고, 심지어는 정치인들이 찾아와서 현안 문제에 대한 의견을 듣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 오는 학생들에게 가끔씩 주제를 주고 개인의 의견을 쓰도록 하기도 했는데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었다. 그러면 그 의견을 주간한국에 전재를 했는데 최근에 옛날 신문을 찾아보면서 그때를 회상하기도 했다. 세시봉에는 젊은 학생들만 온 것이 아니다. 30, 40대쯤 되는 사람들도 와서 젊은이들과 대화도 나누고 가곤 했다.
한번은 40대 후반쯤 되는 부인이 와서 나를 면회하자고해서 만난 적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기 아들이 이 음악 감상실에 매일같이 다닌다고 해서 도대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부인이 다음날부터 단골이 되어 버렸다.
세시봉에서는 몇 가지 금기사항이 있었다. 술 마시는 것은 절대로 안 되고,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것도 안 되고, 주먹 쓰는 사람들은 출입 금지였다. 또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질서가 아주 잘 지켜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일 잘못하다가 '찍히게' 되면 그 친구는 출입금지가 된다. 질서 속에서 젊음이 발산되고 낭만이 표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집주인 이흥원 선생의 주관이고 또 그것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러자니 매일같이 작고 큰 충돌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세시봉 하나만 가지고도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 60년대이고, 70, 80시대다. 나는 그 무렵을 생각할 때마다 잔잔한 미소를 떠 올리며 행복함을 느낀다. 어찌 보면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가 잘 살지는 못했으나 모두가 낭만을 느끼는 여유는 가지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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