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이미 국제화 시대의 한가운데 있다. 전시팀장으로 근무한지 겨우 5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멕시코, 페루, 이집트, 튀니지의 주한 대사나 1·2등 서기관을 박물관에서 만나 전시 개최 문제를 협의하다 보니 그야말로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최근에는 색다른 손님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의 박물관에 우리 문화재를 전시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찾아온 분들이다.
예를 들어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V&A), 스웨덴 동방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관계자 일행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철저한 비즈니스 정신을 현란한 화술로 구현해 내는데 노련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박물관 운영을 위해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에 익숙해서인지, 소장품 대여나 자료 제공을 언급할 때에도 당당함이 배어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이름난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그들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스웨덴 동방박물관의 산네 호비닐슨 관장은 큰 키에 세련된 매너가 일품이었다. 장년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스웨덴의 청정한 자연환경 때문일까 추측해보았을 정도였다. 그녀는 동방박물관의 콜렉션(collection)을 갖게 된 연유를 유창한 영어로 설명하면서 현재 쿠스타프 국왕의 할아버지가 1926년 경주 서봉총(瑞鳳塚) 고분의 발굴에 참여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를 자연스레 친구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 들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동행한 에바 뮈르달 부관장 역시 관장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우리 박물관 소장품으로 특별전을 개최하고 싶다면서 미소 띤 얼굴로 자연스럽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뒤이어 찾아온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의 베스 맥킬롭 아시아 부장도 유연한 사고와 서구인 특유의 매너로 자신감 있게 박물관 현황을 설명하고, 새로이 도자관(陶瓷館)을 신설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청했다. 같이 자리한 사람들 모두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의 도자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화제는 자연스럽게 예전에 설치된 '한국실'로 이어졌다.
사실 외국의 대형박물관에 있는 한국실은 개설된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제대로 갖추어진 전시환경과 풍부한 소장품, 한국어까지 구사하는 큐레이터를 갖추었으니 그다지 걱정할 일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실의 세세한 운영 현황까지 열정적으로 설명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러시아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올가 데쉬판데 극동과장은 박물관 경력만 47년에 이르는 베테랑 큐레이터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할머니에 해당될 연세지만, 짧은 방문기간 동안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러 차례 우리 큐레이터를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노련한 협상가였다. 그녀를 수행한 안나 사벨리예바 연구관은 일본문화를 전공한 덕인지 동양 문화 전반에 대한 식견이 있었고, 러시아 미인의 부드러운 미소로 올가 데쉬판데 과장의 엄격함을 보완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 위에 우리 박물관의 젊은 여성 큐레이터들을 겹쳐보면서, 곧 국립박물관에도 여성 파워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여성 특유의 부드러움과 강인함, 그리고 전문적인 식견을 무기로 세계무대에서 한국문화를 당당히 소개하고, 스스로 '국립박물관'을 넘어서 '한국문화'의 아이콘(icon)이 되는 그러한 시대 말이다.
유병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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