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국회의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정부가 29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추경예산안을 제출한 것에 대해 야당이 총리의 사과를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미 올 예산안을 한 차례 수정했던 정부가 1분기도 지나지 않아 다시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며 슈퍼 추경안을 들이밀려면 국회와 국민에 대해 먼저 사과하는 것이 도리라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한승수 총리는 "세계 경제가 급박하게 변해 정부가 능동적으로 선제 대응을 하려는 것인데 왜 사과해야 하느냐"며 버텼다. 그런 일로 총리가 사과한 전례도 없다고 했다.
추경안 사과 거부는 적반하장
결국 이 소란은 국회부의장의 중재로 한 총리가 "의장의 뜻을 받들어 추경안 국회 제출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선에서 일단락됐지만 뒷맛은 참으로 쓰다. 국민의 주머니를 털어 나라살림을 하는 정부가 계산이 잘못됐다며 잇달아 새 청구서를 발행하면서도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서다.
전직 주무장관이 대외 발표용과 대통령 보고용 성장예산치를 따로 작성한 이중가계부를 만들었다고 실토한 것은 안중에도 없다. 아무리 경제환경이 급변했다지만 다음 세대에까지 부담을 지우는 거액의 청구서를 내놓고 고작 '의장의 뜻을 받들어 유감 표명' 운운한 것은 거의 적반하장 수준이다.
불과 며칠 전 한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의 추경안 시정연설을 대독하면서 "경기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소요만 반영한 것이니 원안대로 신속하게 처리해 달라"고 요청한 것과는 180도 다른 행태다. 또 '깽판국회' 등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연이은 국회 폄하발언이 물의를 빚자 국무회의와 당정회의에서 장관들의 신중한 언행을 당부하거나 '오버'하지 말라고 나무란 진의도 의심케 한다.
총리의 작은 오버를 뭐 그리 까탈스럽게 문제 삼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총리의 고압적 발언이 던지는 실망과 우려는 너무 크다. 우선 정치도의적으로 정부는 작년 하반기부터 불과 6개월 만에 3번의 다른 예산안을 제출하면서 중ㆍ장기 재정운용계획을 전면 수정한 데 대해 당연히 먼저 사과했어야 했다. 야당에게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모든 국회 발언은 국민을 향한 것이라는 기본도 모르는 처사다.
혹시라도 한 총리가 최근 일부 경기지표의 호전에 고무돼 그처럼 분별없는 언행을 했다면 더욱 걱정이다. 날개가 부러진 새라도 강력한 선풍기 바람만 있으면 어느 정도 날아가는 것은 상식이다. 한국은행이나 주요 연구기관은 물론, 기획재정부마저 예전 같지 않은 신중한 자세를 유지하며 V자형 반등 대신 L자나 U자형 회복 전망에 더 기대는 이유일 것이다. 한 총리가 누구보다 이런 사정을 잘 안다고 보면, 정작 걱정되는 것은 경기지표의 오판이 아니라 경제위기 극복만 내세우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무모한 자신감이다.
이 점에서 정부는 두 가지를 새기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최근 한 경제포럼에서 "어려울수록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정부에 던진 고언이다. 그는 "경기가 불황인데 부동산 투기 걱정을 할 때냐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고도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고 돈과 규제를 풀고 보자는 정부의 '정책투기'를 빗댄 말로 들린다.
'입구전략' 넘는 '출구전략' 필요
두 번째 충고는 이 대통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런던 G20 정상회의 합의문에 잘 나와 있다. "금융부문을 지원하고 글로벌 수요를 회복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것과 별도로 장기 물가안정과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뢰할 만한 출구 전략(exit strategy)'을 마련키로 했다"는 11조가 그것이다. 출구 전략이란 쏟아부은 돈이 초래할 인플레 등의 후유증 대비책을 말한다. 어제 열린 금융재정학회 심포지엄이 출구 전략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과 통한다..
세상의 눈은 이렇게 한 발 앞서 가는데 정부의 심모원려는 보이지 않는다. 아쉬우면 만지작거리는 게 교통세 등 서민대상 세금 인상이다. 정부의 위기관리 노력은 결코 폄하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비용은 모두 국민 부담이다. 나중에 달콤한 열매로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은 정부가 사과하는 게 옳은 이유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