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대한 재무구조평가가 채 끝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대기업 구조조정을 둘러싼 정부와 기업간 샅바싸움이 치열하다. 4월 들어 금융시장에 훈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알짜 계열사 매각과 몸집 줄이기를 압박하는 채권단ㆍ정부와 이를 거부하고 버티는 일부 대기업 사이에 갈등의 조짐마저 보인다.
● 압박하는 금융당국 채권단
먼저 기선제압에 나선 건 금융당국.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13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경밀레니엄포럼 조찬강연에서 "대기업이 부실을 조속히 털어내야 국민경제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 위원장은 "시장에서는 속도감 있게 느낄 수 있는 정도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면서 "대기업도 지난 세월 무리했던 부분은 자구노력을 통해 정리하고 가는 것이 국민경제와 금융회사 손실을 최소화하고 국민경제 이익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굵직굵직한 대기업 다수의 지분을 보유한 산업은행의 민유성 행장 역시 지난 9일 "대기업들이 글로벌 경제가 본격 상승하기 전에 불필요한 자산을 과감하게 파는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며 입을 맞췄다.
사실 이 같은 발언은 그간 정부의 입장에 비춰볼 때 때이른 감이 있다. 주채권은행들이 주채무계열 45개 그룹에 대한 재무평가를 완료하는 시점은 이 달말. 이 평가에서 일정 기준에 못 미치는 그룹들은 다음달에 채권은행과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체결하고 자구노력을 하는 절차를 밟으면 되며, 정부가 미리 개입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간 금융당국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 위원장은 이날 대기업 재무평가가 끝나기도 전에 대기업에 계열사 매각을 통해 몸집을 줄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다.
● 압박배경
금융당국이 이처럼 강경한 입장을 보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그간 1, 2차 조선ㆍ건설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기된 부실평가, 지지부진 논란 등을 대기업 구조조정까지 이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진 위원장도 최근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는 안팎의 비판을 수용하며 개선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실적으로 외환위기 당시처럼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대기업 구조조정만큼은 '재무구조 개선약정'이라는 무기가 있는 만큼 선제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작년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체결했던 그룹은 모두 6곳이다. 재무구조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부채비율. 지난 1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자료에 따르면 민간기업집단 가운데 11개 그룹이 부채비율 200%를 넘어섰다.
전체 평균 부채비율은 약 20%나 상승했다. 이에 따라 올해엔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대상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약정을 맺지 않더라도 구조조정을 요구받는 그룹도 나올 전망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업종에 따라 재무지표에 나타나지 않는 부채도 있을 수 있어,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대상은 아니지만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도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달 들어 안정세를 보이는 금융시장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 2월부터 대기업 계열사 매각 등을 통한 자구안을 마련하라는 입장을 채권단을 통해 전달했다. 그러나 대부분 대기업들이 기껏해야 부동산 매각안 등을 제시하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금융시장 상황이 너무 나빠 계열사 매각 자체가 어렵다는 게 당시 기업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달 들어 시장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구조조정 적기가 왔다는 게 정부 논리다.
● 눈치보는 대기업
이에 따라 이미 계열사 매각, 유상증자 등을 통해 현금 확보에 나선 대기업도 있다. 동부그룹은 알짜 계열사인 동부메탈을 매물로 내놓고 주채권은행인 산은이 이를 인수해주기로 가닥을 잡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생명을 매물로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고 있다. 두산테크팩과 주류사업 부문을 이미 매각한 두산그룹은 추가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지분과 두산DST도 팔 수 있다는 입장이며, 대한전선그룹도 대한ST, 트라이 등 계열사를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구조조정 과정에서 상당수 대기업은 정부ㆍ채권단과 구조조정 수위를 놓고 갈등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난 몇 년간 계열사를 늘리고 몸집을 불려 경기침체에 버티기 힘든 기업들이 일부 있다"면서 "특히 최근 금융시장이 호조를 보이면서 조금만 버텨보자는 생각도 있을 수 있지만, 이번 불황이 장기화할 수 있는 만큼 더 위험해지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기업구조조정기금에 금융기관 부실채권 뿐 아니라 기업 자산까지 매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산은이 사모투자펀드(PEF)를 통해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하도록 하는 등 대기업 구조조정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기업의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채권단이 자금지원 중단, 여신회수 등으로 압박할 경우 무한정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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