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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뿌듯 성적 쑥쑥 '요술 저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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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뿌듯 성적 쑥쑥 '요술 저금통'

입력
2009.04.1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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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아이들의 입가엔 미소가 절로 번졌다.

9일 오후 경기 의정부시 금오동 의정부 나눔 공부방. 열두살 대우는 공부방에 오자마자 조용히 TV테이블 아래 놓인 페트병 앞으로 달려갔다. 이날 부모님께 받은 용돈 1,000원 중 300원짜리 지우개를 사고 남은 돈 700원을 페트병 저금통에 넣었다.

예진(13ㆍ여)이도 주머니를 뒤져 아침에 샤프심 하나를 사고 남은 돈 300원을 고사리 손으로 저금통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싶은걸 꾹 참고 남겨 둔 것이었다. 예진이는 "누군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뿌듯해요"라며 의젓하게 말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초중고생 48명이 함께 공부하는 나눔 공부방에 페트병으로 만든 저금통이 만들어진 후 달라진 풍경이다. 아이들의 생활 태도가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성적까지 쑥쑥 올라가 '요술 저금통'으로도 불린다.

이 공부방에 페트병이 놓인 것은 2007년 가을.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작은 나눔을 실천하자는 김흥식(56) 교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공부방 아이들이 도움받는 것만 당연히 여기다 보면 독립심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었다.

"용돈을 모으자"는 얘기에 아이들의 첫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김 교사는 말없이 공부방 곳곳에 아프리카의 굶는 아이들 사진을 붙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아프리카 상황을 물었고 김 교사는 동전 하나로 아프리카 친구들이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하나 둘 용돈을 아끼면서 페트병에 100원, 200원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중학생 유리(14)는 "처음에는 우리도 힘든 데 누굴 돕냐며 불만인 아이들도 있었는데 또래 친구들을 우리 힘으로 돕는 기쁨을 알게 되면서 꼬박꼬박 돈을 넣는 친구들이 많아졌다"며 자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페트병 저금'은 벌써 3년째 연말 기부로 이어졌다. 한 해에 모이는 돈은 20여만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아이들의 콧물이 묻은 돈은 아프리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모기장을 보내는 운동에 사용됐고, 화재로 공부방을 잃은 해송지역아동센터에도 보내졌다.

정작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변화였다. 저금통이 만들어진 후 아이들의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된 것이다. 학교에서 성적이 평균 10점 이상 오르면 받는 '학력 진보상'을 비롯해 으뜸상, 글짓기상 등 공부방 벽은 아이들의 상장으로 도배돼 있었다.

특히 지난해엔 과외를 받아도 들어가기 힘들다는 영재교육원에 3명이나 합격했다. 김 교사는 "엇나가기도 하던 아이들이 이웃을 돕는다는 뿌듯함을 느끼면서 공부에도 더욱 몰입하게 됐다"며 "아이들 성적이 오른 소문이 퍼지면서 학원 대신 공부방에 보내고 싶다는 학부모까지 있을 정도"라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금오환경지킴이'라는 이름으로 2주에 한번씩 동네 청소에 나서고 있고, 5월에 금오중학교에서 경로잔치에서는 장기자랑 공연도 할 예정이다.

공부방 아이들이 주변 동네 청소와 노인 봉사에도 나서다보니 동네 어른 뿐 아니라 주변 학교에까지 인기 만점이다. 김 교사의 부인이자 이곳 시설장인 이말필(51) 교사는 "아이들 누구 하나 공부방 다닌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며 "주변에서 공부방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고 칭찬 할 때는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공부방 아이들이 이렇게 변한 데는 김 교사의 노력이 컸다. 울산에서 15년간 보습학원을 운영했던 그는 50대에 접어들어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다며 아내와 함께 공부방을 시작했다. 학원도 못 가는 처지의 아이들을 학원 다니는 친구들 부럽지 않게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은 금방 열리지 않았다. 그때 깨달은 게 공부도 기부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 교사는 페트병 저금의 경우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넣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김 교사는 공부방 입구에 수북이 쌓여 있는 학습지를 자랑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48명의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가 이곳 저곳에서 사정하며 구해온 학습지들이었다.

학습지 구입을 위해 출판사나 기업에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여태껏 자존심이 강해 누구한테 도와달란 말 한 번 안하고 살았지만, 그래도 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괜찮습니다."

의정부=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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