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5시께 서울 신사동 한 건물 지하에 있는 무용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 여인이 라틴 음악에 맞춰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는 이들의 손동작에 따라 허공에 화려한 물결 무늬를 그렸고, 5㎝ 높이 통굽 구두가 바닥에 부딪치며 내는 '탁~탁~' 소리가 장식음처럼 음악에 섞였다.
간혹 비스듬히 선 채 한 쪽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내뱉는 "올레(좋아)~" 소리가 넓은 연습실 안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스페인이 원류인 집시들의 댄스, 플라멩코다.
춤꾼들이 가쁜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잠시 쉬는 시간. 플로어를 휘젓던 이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졌다. 음악을 끄러 가는 발걸음은 주춤댔고, 오디오에 눈을 바짝 대고 전원을 찾았다. 저시력 장애인들로 구성된 플라멩코 무용단 '라루스'다.
스페인어로 '빛'을 뜻하는 '라루스' 무용단은 2006년 결성됐다. 단장 양정옥(38)씨는 "사람들은 우리가 빛을 동경해 붙인 이름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우리가 춤을 통해 환한 빛을 주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단원은 양씨를 포함해 모두 6명이다. 이날은 21일 송파구 장애인복지관에서 열리는 장애인의 날 행사 초청공연을 맡은 양씨와 박재한(41), 윤선영(24)씨 3명만 연습에 참여했다.
시력장애 1~2급인 이들은 바로 앞 물체가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시신경위축증을 앓고 있어 수술로도 시력을 회복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장애도 플라멩코를 향한 열정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박씨는 "세계적으로 시각장애인 플라멩코 공연단은 우리가 최초일 것"이라며 "안 보이는 것은 춤 추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씨는 4년 전 스페인에서 플라멩코를 전공하고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던 롤라 장씨를 우연히 알게 된 뒤 플라멩코에 빠져들었다. 춤은 집과 직장만 오가고 바깥 출입을 꺼리던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운동 부족으로 고민하던 박씨는 2004년 시각장애인 여성회의 권유로 플라멩코에 입문했다. 막내 윤씨는 지난해 12월 무용단을 찾았다. 앞으로 쏠린 자세를 교정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어느새 실력이 쑥쑥 늘어 21일 첫 무대에 서게 됐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이들은 모두 플라멩코 예찬론자다. 윤씨는 "미치지 않고는 하지 못한다"고 했다. 박씨는 "정열적인 움직임, 화려한 의상, 바닥에 부딪히는 경쾌한 구두소리, 캐스터네츠의 딸깍거리는 소리 등 모든 것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플라멩코가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은 자신감이다. 윤씨는 "숟가락을 입에 넣는 것을 신기하게 보는 사람까지 있어 상처도 많이 받았다"면서 "플라멩코를 배우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들에게 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깨뜨리는 도구이자 무기다. 양씨는 "장애인은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바꾸고 있다. 일반인 무용단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는데, 함께 했던 일반인들이 '잘 보이는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라루스'는 지난 3년 동안 40회가 넘는 초청 공연을 했다. 5월엔 일본 장애인골프협회 초청으로 양 단장의 단독 공연이 예정돼 있다. 창단부터 함께 한 양 단장과 박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으로 2006년 2월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소아 안암 환우 돕기 콘서트'를 꼽았다. '라루스'의 첫 공연이었다.
박씨는 "보이지도 않는 관중의 시선이 의식되고, 실수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와 표정은 굳었다"며 "어떻게 끝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했는데 관객들이 '올레~'를 외쳐주어서 너무 기뻤다"고 회상했다.
가장 큰 애로는 이동수단.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장애인 택시를 주로 이용하는데, 이용자가 많아 예약이 쉽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도 걸림돌이다. 2007년 한 복지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초청돼 공연을 했는데, 출연료를 받지 못했다.
양 단장은 "당시 관계자가 '좋은 취지로 하는 일에 돈을 바라느냐'는 식으로 말해 실망했다"면서도 "지금은 아예 교통비 10만원 정도만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각자 안마소에서 일하며 버는 월급 150만원 안팎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하루하루 더 큰 꿈을 꾼다. 주위에 도움을 주는 이들도 많아졌다. 최근엔 강남구 장애인복지관에서 매니저를 자청했다. 공연 추진과 출연료 협상은 물론, 이동수단도 마련해주기로 했다.
일본인 지인의 도움으로 '라루스' 단체 공연도 성사 단계에 있다. 양 단장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 미국 나아가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스페인 무대에도 서고 싶다"고 말했다.
이대혁 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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