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한국 등 주변국을 폄하하는 내용을 담은 또 하나의 우익 중학 역사교과서가 9일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했다. 이로써 내년 새 학기부터 일본 우익 역사교과서가 기존 후소샤(扶桑社)판 '새로운 역사교과서'와 새로 나올 지유샤(自由社) '중학사회 역사' 2종으로 늘어난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이날 교과서검정심의회를 열어 지유샤가 발간한 '중학사회 역사' 교과서에 대해 최종 검정 합격 판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지유샤판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부정하는 임나일본부설을 후소샤와 동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을 '출병'이라고 표현하고 강화도 사건의 도발 주체와 목적, 경위를 은폐해 일본의 한국 침략 의도를 부정했다.
한반도가 '대륙에서 팔처럼 돌출해' 있고 이를 통해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미친 적도 있었다'며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한반도 강제병합을 일본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처럼 기술하고, 식민지 정책의 초점이 한국의 근대화에 있었던 것처럼 미화하는 대목도 나온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징병이나 징용의 강제성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군위안부는 아예 기술 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날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그릇된 역사 인식에 기초한 역사교과서가 일본 정부 검정을 통과한 데 강력히 항의하며 근본적 시정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조태영 외교부 동북아국장은 다카하시 레이치로(高橋禮一郞)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불러 항의하고 주일 한국대사관 당국자도 일본 외무성을 항의 방문했다. 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2005년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 때 외교부 장관이 주한 일본대사를 부르고, 주일대사가 외무성을 찾아가 항의했던 데 비해 수위가 낮아진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이번 교과서 문제로 양국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정부의 속내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일본 교과서 왜곡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유샤 교과서는 후소샤 교과서를 만든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후소샤와 손을 끊고 급조해 지난해 4월 검정 신청한 책이다. 일본 교과서는 보통 4년마다 문부성 검정을 받기 때문에 2005년 이후 4년째인 올해는 검정 결과 발표의 해이다.
하지만 지난해 문부성이 마련한 새학습지도요령이 중학 과정의 경우 2012년도부터 적용되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이에 맞춰 새 교과서를 내려고 지유샤 이외에는 아무 곳도 교과서 개정판 검정 신청을 하지 않았다.
지유샤판은 1차 검정에서 부적절한 기술, 오자 등 수정해야 할 곳이 무려 516곳이나 나와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를 수정해 재신청한 뒤 다시 136곳의 수정 지적이 있었고 이를 재수정해 최종 검정을 통과한 것이다.
이름은 달라도 지유샤판이 후소샤와 다른 종류의 우익 교과서라고 하기는 어렵다.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새역모 회장 등 집필진이 후소샤와 겹치는 데다 차례며 내용이 후소샤 교과서를 고쳐 썼다고 봐도 좋을 만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익 교과서 반대 운동을 하는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 네트 21'의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사무국장은 "그림과 사진의 배치나 크기 정도만 다를 뿐 90% 이상 후소샤 교과서와 같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학교가 이 교과서를 채택할지 주목된다. 후소샤판 2001년, 2005년 검정통과본의 채택률은 학생수 기준으로 각각 0.039%, 0.406%에 불과하다. 내용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현재로는 이들 우익 교과서의 채택률이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 시민단체들 "정부, 日에 검정합격 철회 강력 요구해라"
동북아역사재단은 지유샤 교과서의 검정 통과에 대해 9일 성명을 내고 "극우단체가 자신들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후소샤판 교과서를 표절한 수준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재단은"일본 문부성이 표절 교과서를 검정 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며,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의 맥락에서 주시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전국역사교사모임, 흥사단 등 2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세계 NGO 역사포럼'도 성명을 내고 "지유샤의 교과서는 일본 침략전쟁을 미화하면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검정 합격 철회를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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