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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텍사스… 野性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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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텍사스… 野性의 추억

입력
2009.04.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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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멋진 서부영화를 찍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텍사스의 풍경. 초록이 단 한 번도 끊기질 않는 거대한 들판엔 싱싱함이 넘실대고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그 초록의 벌판 곳곳에 검은 석유를 뿜어 올리는 오일머신까지. 드넓은 텍사스 평원은 부(富)가 차고 넘치는 땅이다.

거대한 부는 탐욕과 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텍사스는 그 시작부터 피의 역사를 쓰고 있다. 텍사스 지역은 원래 멕시코의 지배 하에 있었다. 1835년 이 지역에 들어와 살던 백인들이 텍사스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을 획책하자 발끈한 멕시코 정부는 6,000명의 군대를 보내 단숨에 그들을 제압했다.

서부영화의 단골 소재였던 '알라모 요새'가 바로 백인들이 멕시코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현장이다. 당시 궁지에 몰렸던 백인들은 미합중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고, 결국 알라모 요새에서 외롭게 싸우다 전멸당했다. 텍사스주 깃발의 외로운 별 '론스타'(lone star)는 이 알라모 전투에서 유래한다.

이후 미국은 1845년 결국 텍사스를 합병했고 이를 빌미로 미국과 멕시코 간에 전쟁이 발발, 미국은 일방적 우세 속에 텍사스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등 멕시코 땅 3분의 1을 거둬갔다.

'텍사스의' '텍사스 사람'을 뜻하는 '텍산(Texan)'. 발음만으로도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거대한 부의 소용돌이 속, 질곡의 텍사스 역사를 잠시 뒤로 하고 잠시 텍산이 되어보기로 했다.

야생마와 성난 황소를 두려워 하지 않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서부 개척의 첨병이었던 프론티어들. 무한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거세되지 않은 남성성의 향수를 흠뻑 들이마시기로 했다.

짝 달라붙는 청바지에 번쩍거리는 버클을 달고,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 쓰고는 실눈으로 강렬한 텍사스의 태양을 노려본다.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서부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정통 웨스턴 살롱에 앉아 삐걱이는 나무 문을 박차고 들어올 황야의 무법자를 기다려 본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에서 여러 번 되풀이해 봤던 영화 '자이언트'.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딘 등 당대 최고의 배우가 열연한 이 영화는 텍사스에 대한, 텍사스를 위한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텍사스는 미국의 다른 주와는 영 딴판인 거의 다른 나라로, 대단한 자부심을 지난 사람들의 땅으로 묘사됐다. 스크린 속의 텍사스에선 수천 마리의 소떼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장정을 벌였고, 대문에서 집까지 80km를 달려야 할 만큼의 광대한 농장이 펼쳐졌다.

남부의 자존심 텍사스에서도 서부의 숨결이 이제껏 살아 꿈틀대는 곳이 있다. 미국에서 가장 서부답다는 곳, 한때 소 무역의 중심이었던 포트워스다.

19세기 중반 코만치족의 습격에 대비한 군 전초기지를 시작으로 건설된 도시다. 마천루가 스카이라인을 이룬 포트워스 시가지 뒤편에 옛 서부시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포트워스 스톡야즈 국립 역사지구가 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최대의 가축 집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이곳에서 소떼를 모아 치숌(Chisholm) 트레일을 따라 캔자스까지 수십 일이 걸리는 거대한 소떼몰이가 이뤄졌는데 이곳에서 당시 3달러를 주고 산 소가 캔자스에 도착하면 35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스톡야즈의 거리에선 포트워스의 100년 전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1900년대 초반에 세워진 호텔, 흥겨운 컨트리 음악이 끊이지 않는 정통 웨스턴 살롱, 카우보이 부츠와 모자를 파는 오래된 상점들이 길가에 잔뜩 늘어서 있다.

포트워스는 1918년 최초로 실내에서 로데오 경기를 벌인 곳으로 스톡야즈의 카우타운 경기장에서는 매 주말 저녁 박진감 넘치는 실내 로데오 경기를 볼 수 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난 후 로데오가 시작된다. 말똥 냄새 낮게 깔린 로데오 경기장. 성조기를 든 여자가 말을 타고 경기장으로 들어와 잔뜩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시킨 다음 본격적으로 경기가 열린다.

성난 황소에 올라타는 게임이 먼저 시작된다. 우리에 갇힌 소의 거센 몸짓에 나무 울타리는 부서질듯 쿵쿵거린다. 문이 열리자 황소는 미친 듯 뛰고 돌고 난리다. 자신의 등에 올라탄 카우보이를 떨어뜨리려고 빙빙 돌고 껑충 뛰는 모습이 비보이의 몸짓을 닮았다. 노련치 못한 카우보이는 금세 나가떨어졌고 아쉬움의 분을 삭이지 못해 주먹으로 가슴을 쳐댄다.

사실 황소가 성을 내는 건 본연의 성정 때문이 아니라 몸통을 옥죈 두 가닥의 밧줄과 우리 안에서 박차로 가해진 고통 때문이라고 한다. 미친 듯 날뛰던 소도 등에 올라탄 사람이 떨어지고 몸을 죄던 밧줄이 풀어지면 금세 순한 제 성질로 돌아간다.

황소 타기 다음엔 송아지 올가미 걸기, 야생마 타기, 여성들의 배럴 레이싱(말을 타고 3개의 큰 통을 빠른 시간에 돌아오는 게임) 등이 이어진다. 말 타는 카우보이들도, 이를 지켜보는 관중들도 서부시대 야성의 추억을 되새김질한다.

밤 10시가 넘어 로데오 경기를 마친 관중들이 또 줄지어 찾는 곳은 스톡야즈의 '빌리 밥스 텍사스'다. 예전 가축거래소로 쓰던 건물이 초대형 나이트클럽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동시에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과연 텍사스답다. 세대간 격리와 물 관리에 철저한 한국의 나이트클럽과 달리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너나 없이 함께 어울려 흥겹게 즐긴다.

스톡야즈 거리에선 하루 두 번 실제 소떼의 행진이 이뤄진다. 수천마리의 소떼를 기대했다면 실망한다. 텍사스의 상징인 뿔이 유난히 긴 소 '롱혼' 16마리가 카우보이에 이끌려 길을 걷는다.

포트워스(텍사스)=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텍사스 스테이크… 컨트리음악 흥얼대며 한입

텍사스의 대표 음식은 바비큐와 텍스 멕스다. 텍사스 주민들은 바비큐가 처음 시작된 곳이 텍사스라며 바비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텍스 멕스는 텍사스와 멕시코 음식의 최고만을 결합한 형태. 멕시코 음식 재료에 텍사스만의 개성을 합한 것이 바로 텍스 멕스다.

텍사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음식이 텍사스 스테이크다. 광활한 땅덩어리만큼이나 스테이크의 크기도 벅차다. 16온스(453g) 나 되는 두툼한 스테이크에 기가 질릴 정도다.

포트워스 시가지의 ‘조 가르시아스(Joe T. Garcia’s)’는 유명한 멕시칸 음식점이다. 1935년 16개의 좌석으로 시작한 이 집은 지금은 1개 블록을 몽땅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3대째 대를 이어 정통 멕시칸 요리를 선보인다.

주말이면 마치 서울 효자동의 삼계탕집에 복날 줄 서듯 흰 담벼락을 따라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카드는 사절, 현금만 고집하는 배짱이 통하는 유명 맛집이다.

도심의 리아타(Reata)는 영화 ‘자이언트’의 농장 이름을 딴 음식점으로 텍사스 스테이크로 유명하다.

스톡야즈의 ‘화이트 엘레펀트 살롱’은 정통 웨스턴 바. 신나는 컨트리 음악이 끊이질 않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미국인들이 ‘샤이너’ ‘론스타’ 같은 텍사스 맥주를 마시며 떠들썩한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바 한 쪽 구석의, 얼음 위의 컬링과 비슷하게 모래를 뿌려 놓은 나무판 위에 납작한 쇠뭉치를 밀며 게임을 즐기는 셔플보드가 이색적이다. 바의 천장엔 유명 카우보이와 영화배우들이 기증한 모자가 잔뜩 걸려 있고, 상호에 걸맞게 흰 코끼리 조각들이 장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포트워스의 술집이나 음식점은 언제나 시끌벅쩍하다. 레스토랑에선 조용히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기본 예의에 충실한 미국인들도 유독 포트워스에선 크게 웃고 일부러 목청을 돋군다. 서부시대, 과거로 돌아간 듯, 자기 몸에 각인된 웨스턴의 기질을 맘껏 끄집어내 흥겹게 발산하는 것이다.

포트워스(텍사스)=글·사진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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