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강원 정선군 동면 화동초등학교. 정선읍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전교생 60명의 산골 학교다. 원어민 교사 조 헬믹(55)씨가 여느 때처럼 테디베어와 악기를 담은 소쿠리를 안고 1학년 교실을 찾았다.
학생은 아이들이 '곰팅이'라 부르는 테디베어까지 모두 일곱이다. "우일! How are you?(잘 지냈어?)" 헬믹씨가 영어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자, 우일(6)이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1주일에 한 번 뿐인 영어수업은 우일이가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다.
일대일 인사를 마친 헬믹씨는 목에 건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음을 흥얼거렸다. "The farmer in the dell(작은 골짜기의 농부)~ The farmer in the dell~" 그는 한 마디씩 끊어가며 아이들이 따라 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했다.
'farmer(농부)'의 뜻을 일러주려 칠판에 밭 가는 농부도 그렸다. 이어 아이들에게 징 꽹과리 방울탬버린 우드블록 등 악기를 하나씩 쥐어줬다. "One, Two, three, four!(하나 둘 셋 넷!)" 아이들은 악기로 박자를 맞추며 합창을 시작했다. 음악시간인지 영어시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 순간이 헬믹씨 수업의 클라이맥스다.
미국인 헬믹씨는 '하모니카 맨'으로 불린다. 목에 하모니카 하나를 걸고, 품 속엔 동그란 하모니카를 지니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불기 때문이다. 집에는 음색, 음계가 다른 4개의 하모니카가 더 있다. 분신과도 같은 하모니카를 비롯해 각종 악기, 그림까지 곁들인 헬믹씨의 흥겨운 수업 방식 덕에 사교육의 오지 산골마을 아이들이 영어 공부에 신바람이 났다.
"영어가 너무 재밌어요. 노래도 하고 움직이며 배우니까 신나요." 우일이는 정말 신이 나서 말했다. 입학한 지 한 달, 이제 고작 네 번 영어수업을 했을 뿐인데 우일이는 다람쥐, 얼룩말, 하마, 기린 등 영어 단어를 자연스레 읊는다. 이 날 수업에서도 동물 그림 카드를 보고 영어이름을 대는 게임에서 양, 얼룩말, 닭 등을 맞혀 칭찬을 받았다.
1학년 담임 김효진 교사는 "이 곳에는 학원도 없고 부모님이 가르칠 형편도 안돼 한글도 모르고 입학하는 아이들이 많다"며 "영어는 당연히 처음 접하는데 한 달 새 조 선생님 말을 곧잘 알아듣고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헬믹씨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미국 중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1988년부터 99년까지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규슈(九州)대와 사립초등학교의 영어 교사로 일했다. 음악, 미술 등을 접목한 독특한 수업 방식은 이렇게 현장을 거치며 조금씩 다듬어진 것이다.
"원어민 교사는 대부분 젊은 층이라 테솔(TESOLㆍ국제영어교사 양성과정)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30여년 동안 직접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터득한 저 나름의 방식으로 가르쳐요."
그는 한국 전통악기 등을 활용한 음악ㆍ영어 통합 수업의 성과를 6월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제7회 아시아태평양 음악교육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헬믹씨는 서울 강남 등에서는 초등학생부터 SAT(미국대학입학시험) 공부도 한다는 기자의 말에 "Really?(정말?)"라며 깜짝 놀라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초등학생 때는 말하고 듣고 만지는 것으로 충분해요. 책은 중학교 때부터 읽어도 늦지 않아요."
헬믹씨는 2007년 여름 정선에 왔다. "한 나라를 잘 이해하려면 안과 밖에서 두루 살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나고 자란 미국을 훌쩍 떠나 일본에 정착했던 것도, 10년 넘게 살아 제 집 같던 일본을 떠나 귀향했다가 다시 낯선 나라 한국을 찾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의 한국 행을 이끈 것은 국립국제교육원의 원어민교사초청프로그램(EPIK). 그는 당초 경기도를 지원했지만 지원자가 몰리는 바람에 강원도로 밀렸고, 면접 때 다른 지원자들과는 달리 "시골도 괜찮다"고 말한 탓에 산골에 배치됐다.
당시 은행, 상점 어디에도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찾기는 고사하고, 소를 몰아 농사를 짓는 모습에 "지금이 21세기 맞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고 한다.
그런 그도 이제는 주식으로 강낭콩밥에 생된장을 쓱쓱 비벼 먹고, 정선 특산물 곤드레 나물도 즐긴다. 아침에는 동료 교사 차에 얹혀, 오후엔 히치하이킹을 해 학교와 집을 오가며 감상하는 정선의 풍광들도 익숙하고 정겹다고 했다. 한국 말과 글은 잘 모르지만, 직접 붓글씨로 써 원룸의 한 벽면을 채운 '나의 살던 고향은'노랫말에서 그의 애틋한 정선 사랑이 느껴졌다.
헬믹씨는 내년까지 한국에 머물다 프랑스나 중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하지만 발걸음이 쉬이 떨어질 것 같지 않단다. "젊은 선생님들은 여기가 지루하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후쿠오카에서 소음이란 소음은 다 들었어요. 여름이면 아리랑 축제가 열리고, 주말에는 자연 속에서 풍경화를 그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미혼이라 외로운 것만 빼면. 하하."
글·사진 정선=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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