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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화재연구소 9일부터 발굴 20주년 국제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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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화재연구소 9일부터 발굴 20주년 국제학술대회

입력
2009.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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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에서 백제 무왕 당시의 사리장엄구가 출토됐을 때, 학계는 혹시 이곳에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입증할 기록이 나오지 않을까 예의주시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등 일부 기록에 무왕이 익산에 새로운 백제의 도읍을 건설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의 건립 배경을 백제의 익산 천도설과 연관짓는 학자들이 많다. 그리고 익산 천도설을 뒷받침하는 핵심 유적은 미륵사지 인근에 있는 왕궁리 유적이다. 1989년 9월 발굴이 시작된 왕궁리 유적은 올해까지 20년 간 조사한 결과 백제 말기의 왕성이었음이 입증됐다.

폭 240m 길이 490m의 거대한 성벽을 두른 왕성에서는 6세기 중엽의 것으로 보이는 중국 자기부터 백제 때의 토기, 기와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왕궁리 유적은 삼국시대 왕성의 구조와 공간 활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익산을 백제사의 또 하나의 수도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별도의 작은 수도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학계의 논란은 여전히 계속고 있다.

왕궁리 유적을 발굴해온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9, 10일 원광대 60주년기념관에서 발굴 2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익산 왕궁리 유적의 조사 성과와 의의'라는 주제로 한ㆍ중ㆍ일 3개국 연구자들, 특히 도성(都城) 유적 전문가들을 초청해 왕궁리 유적이 갖는 의미를 조명한다.

김삼룡 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익산은 백제 무왕의 천도지로 경영되었으며, 그 핵심적인 유적이 왕궁성이었다"는 의견을 밝힌다. 최근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기의 문양이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함 문양과 일치하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최완규 원광대 교수는 여기에 덧붙여 "익산 천도는 법왕 때부터 계획됐으며, 마한계 세력을 아울러 왕권 강화를 꾀했던 무왕에 의해 실행됐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주성 전주교대 교수는 익산으로 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 "무왕이 익산을 수도와 같이 취급하여 수도의 행정구역인 별부(別府)를 설치했다"는 주장을 편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공꿔치앙 연구원은 왕궁리 유적을 중국 남북조 문화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의 이노우에 가즈히토 연구원은 왕궁리 유적에서 발견된 화장실을 일본 고대 도성의 화장실과 비교한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은 왕궁리 유적의 건물지 구조를 부여 지역의 건물지와 비교 분석한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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